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산청) 사적 제305호 :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南冥梅)

 

사적 제305호 :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南冥梅)

 

 

 


언제 : 2019년 6월 6일 토요일

어디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남명 조식선생 기념관 맞은편

 선생이 61세 되던 해부터 별세하실 72세까지 제자들을 양성했던 산천재를 찾아간다.

 

남명 조식 선생은 실천적 성리학을 일깨우셨기에

제자나 후예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거나, 조선말 진주민란과 일제강점기엔 일제와 맞서 

목숨을 바친 순국자가 많음은 그의 가르침의 영향일 것이다.

 

남명 조식은 1501년(연산군 7)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군)에서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나

 퇴계는 71세, 남명은 72세로 운명을 마감했다.

 

기묘사화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며 곧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관직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55세에는

조선 오백 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목숨을 내 놓은 그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를 명종에게 올렸다.

 

61세 되던 명종(明宗) 16년(1561)

구름에 살짝 가린 지리산 천왕봉이 자애롭게 내려다보는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 사리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제생(諸生)에게 강학(講學)하던 중 11년(年) 후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지리산 천왕봉

 

  

남명학의 요체

內明者敬 내명자경 - 안으로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이고

外斷者義 외단자의 - 밖으로 밝고 올바름을 실천 단행하는 것이 (의)다

 

 

선조가 보낸 남명선생 제문

▼ 

 

 

 

  

남명선생 시비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조식(曺植)

덕산 개울가 정자 기둥에 제하다-조식(曺植)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 천 섬들어가는 큰 종을 보게
非大叩無聲(비대고무성) :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나지 않는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 어떻게 해야만 두륜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

 

 

산천재(山天齋)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 덕산으로 이주해 이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 하였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주역대축괘(大畜卦)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조식(曺植,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1572년 2월 21일 (음력 2월 8일))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일설에는 배척되었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버렸다.


그리고는 처가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1527년 중종 22년 부친 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와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중종 26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그의 학문적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30대 후반에 낙동강을 기준으로

퇴계는 영남 좌도, 남명은 영남 우도의 종장으로 분류될 만큼 학계의 위상과 사림에서

영향력은 대단했었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1539년(중종 33년) 38세에 특별히 초빙되어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다.

 

그의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자 회재 이언적은 그를 왕에게 추천하여 헌릉참봉을 내려주었으나 조식은 나아가지 않았다.

 또 퇴계 이황의 추천으로 단성현감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퇴계 이황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였으나

후일 퇴계가 고봉 기대승과 리기(理氣)의 사단칠정에 관한 7차 논쟁을 듣고

물뿌리고(灑) 마당쓰는(掃), 쇄소(灑掃)하는 생활 방법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논하며 선비를 참칭한다고 비판하면서

선비관에 대한 차이로 이황과 갈등하게 된다.


 55세에는 조선 오백 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그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를 명종에게 올렸다.


61세 되던 명종(明宗) 16년(1561)

구름에 살짝 가린 지리산 천왕봉이 자애롭게 내려다 보는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 사리(絲里)로 옮겨

66세에 징사(徵士)로서 포의(布衣)로 왕(王)과 독대(獨對)하여 치국지방(治國之方)과 학문지요(學問之要)를 말했다. 

(명종과 독대하여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를 논였으나 벼슬은 하지 않고 낙향했다.)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제생(諸生)에게

강학(講學)하던 중 11년(年) 후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남명 선생이 학문에 정진할 당시 학풍과 주류 사회의 관심은 정통 성리학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달랐다. 그는 성리학 외 의서, 병법, 천문지리 등도 제자들에게 적극 가르쳤다.

잡학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선생은 학계에서 이단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해안가에 왜구들이 출몰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본 선생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해 ‘우리도 힘을 가져야겠다’ ‘왜구에 대응 해야겠다’ 생각하고 행한 일임에도 말이다.

실제 남명 선생 사후 20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당시 남명의 제자 57명이 의병장이 되어 나라를 구하려는 것은 그의 정신과 가르침일 것이다.


그 후 남명정신을 대변하던 정인홍이 인조반정 때 반역죄로 처형되면서 큰 타격을 입고 그의 학풍은 폄하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위기가 왔을 때는 남명의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1862년 진주민란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南冥梅)

 ▼ 

산천제

주련글

춘산저처무방초 (春山底處無芳草)(봄 산 어디엔들 꽃다운 풀 없으리오마는)
지애천왕근제거 (只愛天王近帝居)(상제와 가까워 천왕봉만이 사랑스럽네)
백수귀래하물식 (白手歸來何物食)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살겠나)
은하십리끽유여 (銀河十里喫有餘) (맑은 내 십리 마시고도 남겠지)



 

 

 

 


 

남명과 제자들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南冥梅)

지리산 천왕봉의 정기와 남명선생의 기품이 깃들어 선비의 정신이 가득한 남명매

2월말~3월 초에 꽃이 핀단다.

주점소매하 :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고성독제요 :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창명성두근 :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강활수운요 :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남명선생께서 산천재를 지은 후 직접 매화나무를 심으셨단다.

 

 

 

 

산천재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보다

 

 

 

여재실

문중에서 제사를 드리는 가묘로 남명 선생과 정경부인, 숙부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묘소

산천재 뒷산에 자리 잡고 있는 묘소는 생전에 직접 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산천재를 떠나며

 

"백성은 물이며, 임금은 배이니 물이 노하면 배가 뒤집힐 수 있다"<민암부(民巖賦),

"문정왕후는 "과부"이며, 명종은 "고아"일 뿐"<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목숨을 걸고 상소 직언했던 선비가 바로 남명이었다.

 

해발 1950m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덕천강가에는

지리산만큼 담담하고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대답이 없는 고고한 선비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한번도 만난 적 없으나

같은 해에 태어난 퇴계(退溪) 이황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이었으나

학풍과 출처가 사뭇 달라 개방적 경향으로, 현실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탐구하였다.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였던 남명은 한 시대의 빼어난 봉우리이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후세에게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지 가르침을 주신

선각자이시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청군 시천면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조식(曺植, 1501~1572)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언젠가

남명매가 활짝 피는 날 다시 찾아 뵙기를 간망하며

덕천서원으로 떠나며 선생의 시 한 수 놓는다.

 

 

영련1(詠蓮1)-조식(曺植)

연꽃을 노래하다

華盖亭亭翠滿塘(화개정정취만당) : 꽃 봉우리 늘씬
하고

푸른 잎이 연못에 가득

德馨誰與此生香(덕형수여차생향) : 후덕한 향기

누구와 더불어 이렇게 피어내리오.

請看黙黙淤泥在(청간묵묵어니재) : 보게나, 묵묵히

진흙 뻘 속에 있어도

不啻葵花向日光(불시규화향일광) : 해바라기가

해 따라 빛나는 것과 같지 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