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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산청) 사적 제305호 : 남명 조식(南冥 曺植) 기념관과 단성소(丹城疏)

사적 제305호

남명 조식(南冥 曺植) 기념관과 단성소(丹城疏)

 

 

 

 

 

언제 : 2019년 6월 8일 토요일

어디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조식(曺植,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1572년 2월 21일 (음력 2월 8일)) 선생에 대해서는

어렸을 적 

역사 시간에 매우 강직한 성품으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 좌.우도 사림을 영도한 영남학파의 거두라는 기억이 전부다.

 

선생은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으나 아버지가 벼슬길에 나가자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면서 학문을 배우며,

 

19세 때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죽임을 당하고

숙부도 이에 연루되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잘못된 정치의 폐단을 슬퍼하며 정치 일선에 나서지 않고 

30세 때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의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48세에 고향(합천)으로 돌아와 뇌룡정과 계부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55세에는 조선 오백 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그 유명한 단성소(丹城疏)를 명종에게 올렸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남명선생을 일컬어

“천길이나 되는 벼랑에 서 있는 듯하며,

해와 달과 빛을 다투는 듯한 기상은 지금까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라고 했다.

 

나이가 드니

문득

남명 조식 선생의 삶이 궁금하여 1박 2일 여정으로 산청 여행길에 나섰다.

 

 

지리산 천왕봉이 자애롭게 내려다 보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는

 남명선생의 기념관과 기념관 앞 도로 건너에는 61세에 후진 양성에 힘쓰시다

72세인 1572년 2월 8일 운명하신 산천재가 있다.

 

 

 

 

산천재에서 본 지리산 천왕봉

 

 

 

 

성성문(惺惺門)

남명 조식 선생 기념관 정문 - 성성(惺惺)은 깨어있음이란 의미로 불교 용어이다.

 

 

 

 

 

 

 

 

 남명선생 기념관

 

 

 

 

남명 조식 선생

 

 

 

 

 

우암 송시열이 쓴 신도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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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 = 단성소(丹城疏)=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남명 조식이 1555년 11월 19일(양력 12월 2일)에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이를 사직하면서 조선사 500년 동안 전무후무한 명종에게 올린 상소문이다.

 

 

단성소(丹城疏)

 

선무랑(宣務郞)으로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돌아가신 임금님(중종)께서

신이 보잘것없는 줄 알지 못하시고 처음에 신을 참봉에 제수 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하셔서는 신을 주부에 제수한 것이 두 번이었고, 이번엔 현감에 제수하시니

 신은 떨리고 두려워 마치 큰산을 짊어진 것 같아 감히 인재등용에 정성을 쏟고 계시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해와 같은 그 은혜에 감사 드릴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대목이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버려지는 재목이 없도록 모든 좋은 재목을 다 구해다가 훌륭한 집을 이루는 것은

대목에게 달렸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일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함은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책임입니다.

전하의 인재를 등용하려는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만,

신은 혼자서 걱정되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므로

 신이 머뭇거리며 벼슬길에 나가기를 어려워하는 뜻을 전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고 또 학문이 엉성하면서도 어둡습니다.

신의 문장실력은 전날에 과거의 끝자리에도 끼지 못했고,

신의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려고 10년 동안 노력했지만

 세 번 실패하고서 그만두었으니 애초부터 지조 있게 과거를 일삼지 않은 사람도 아닙니다.

 

가령 과거 합격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조그마한 절개나 지키는

선량한 사람에 불과할 뿐 크게 나라를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가 아닙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형편없는가 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합격하기를 바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과거를 통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대단하게 보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이 명예를 도둑질해서 담당관리의 눈을 속였고,

담당관리는 저의 거짓 이름을 잘못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꼭 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또 도가 있는 사람은 신처럼 이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승도 또한 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됨도 모르면서

그를 등용한다면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 죄가 어찌 이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신이 거짓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팔아

벼슬에 나가는 것이 진짜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보다 어찌 나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이 한 몸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전하를 져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큰 고목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에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들 치고 충성스런 뜻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이

없지만, 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워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 거리며 술과 여색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물크러져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고 있듯이 합니다.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 것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없어지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을 가죽에 비유한다면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이 자주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고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고 답답해하며 흐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떨어지니 하늘의 재앙은 이미 그 징조를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구슬퍼 상복을 입은 듯하니 민심이 흩어진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절에는

비록 주공(周公)같은 분의 재주를 겸하여 가진 사람이 대신의 자리에 있다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풀잎이나 지푸라기처럼 보잘것없는 신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나라의 위태로운 사태를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보호랄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되기는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마한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께 벼슬을 얻는다 해도 그 녹을 먹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점이 신이 벼슬하러 나가기 어려워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왜구의 침략으로 전라도 일대가 함락된 을묘사변을 말함)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때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 일이 벌써 20년 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한 힘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장수 가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에는 수성할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겉으로 드러난 병에 불과하지, 가슴속이나 뱃속의 병은 아닙니다.

가슴속이나 뱃속 병은 덩어리지고 막혀서 아래위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랏일을 맡은 공경대부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 가운데 수레가 있는 이들은 수레를 타고 피난 가고 수레가 없는 이들은 달려서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군사를 불러모아 전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나랏일을 정리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형벌제도 따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극진히 하면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는바, 그 틀은 전하에게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만약 하루라도 능히 새로운 정신으로 깨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교화도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거행한다면

나라는 고루 잘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들은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일을 판단함에 거울처럼 맑고 거울처럼 공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불교에서 이른바 진정(眞定: 참된 경지의 선)이라 하는 것도 단지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만,

일에 적용할 때 불교는 그 발디딜 곳이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유가에서는 불교를 배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고 계신데

그 불교를 좋아하시는 마음을 학문에 옮기신다면 공부하는 것이 우리 유가의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그 집을 다시 찾아 부모. 친척. 형제나 옛 친구 등을 만나보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더욱이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 자신의 경험으로 인재를 선발해 쓰시고 도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전하께서 사람을 취해 쓰실 때 솔선수범 하신다면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취해 쓰실 때 눈으로 본 것만 가지고 하신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하를 곡이거나 져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굳게 자기 지조라도 지키는 고견 좁은 신하인들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정치를 잘하셔서 왕도정치의 경지에까지 이르신다면,

신은 그런 때에 가서 미천한 말단직에 종사하며 심력을 다해서 직분에 충실하면 될 것이니

어찌 임금님 섬길 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셔서,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신의 상소를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신은 두려워 어쩔 줄 몰라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 명종은 당연히 대노했으나,

명사로 이름난 조식을 건드리지는 못했다.

명종실록에서 사관은 조식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고 주석으로 찬양하고 있다. -

 

 

 

 

 

 

신명사도(神明舍圖)


조선 중기의 유학자 조식이

심성수양의 요체를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 한 것이다.

 

신명사도에서 성곽의 안쪽이 사람의 마음이고,

바깥쪽은 외부세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체의 내외부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남명선생이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적 오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운 욕심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선생은 신명사도의 내용을 생활화 하려고 했으며, 합천 삼가 뇌룡정을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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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선생이 별세 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유림의 공의로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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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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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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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山天齋)와 남명매(南冥梅)

1572년 2월 8일 72세로 산천재에서 운명 - 남명매화꽃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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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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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룡정(雷龍亭)

선생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소재

48세부터 12년간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乙卯辭職疏을묘사직소 : 일명 단성소(丹城疏)}를 지어 올렸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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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기념관을 나서며

 

 

유학은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유명한 사상가인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 학문으로,

유학은 후대 학자들이 공자나 맹자의 사상을 다양하게 해석하면서 몇 가지 학문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성리학이다.

 

 

유교와 성리학을 기반으로 건국된 조선 시대에는

삼강오륜을 앞세워 임금께 충성하고, 부모께 효도하고, 상하의 질서를 지키고.....

지배층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상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은 너무 이론적인 면만 강조하는 한계가 있어서

조선 내내 국론은 위정자들에 의해 사분오열로 나뉘고 조선 후기에는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학이 대두되었으나

실학자들이 권력 중심부에서 밀려난 인사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이 정책에 반영되지 못하고

현실 개혁도 이루지 못하자

세도정치에 억눌린 백성은 동학농민운동 등으로 목소리를 내었으나 내부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체

일제강점기를 겪는다.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된 지 60년이 흐른

오늘도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의원들이나 힘을 가진 단체의 장들의 면면을 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을 위해 우리 국민을 힘들게 했던 소위 "친일파"들이 아직도 선량한 국민 앞에 서서

큰 목소리로 억지와 거짓으로 국민을 현혹하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 과감히 나서 나라를 지키던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이 오늘날 다시 연구되어야 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 올바른 나라를 만들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