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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함양) 한국 선불교의 종가 벽송사(碧松寺)

 

한국 선불교의 종가 벽송사(碧松寺)

 

 

 


언제 : 2019년 6월 2일 일요일

어디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259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일은 오장육부를 흥분 시킨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지만, 언어에 대한 걱정이나 행여 부담스러운 일이 생겨도 화해할 수 있고,

여차하면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과 인연은

초등학생 때 수학여행을 화엄사로 갔는데, 도착하여 점심을 든 후부터 배가 아파

1박 2일 동안 숙소에 누워

 스님이 배를 주물러 주며 염불을 암송하며 낫기를 기원했는데도 귀가하는 날까지 배가 아팠던

아련한 기억이 있는 곳이다.

   

벽송사는

지리산과 빨치산 때문에 익히 알고 있었던 곳으로 서암정사와 함께 내 여행 목록에 

항상 기록된 곳이나

이런저런 사정에 의해 내 나이 68세, 아직 여름에 들기 전이라 평지엔 밤꽃 향기가 진동하지만

산중엔 이제 철쭉이 피 늦은 봄날

벽송사를 찾는 기쁨을 갖는다.

 

 

 

벽송사 가는 길에 본 지리산



 




 






벽송사(碧松寺)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 칠선계곡 첩첩산중에 자리한 대한불교 조계종 해인사의 말사이다.  


예로부터 수행처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여러 번의 화재로 인하여 사적기(事蹟記)가 없어 창건연대 및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다만, 현 위치에서 50m 위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 절의 창건 역시 신라 말 내지 고려 초로 보고 있다.


1520년(중종 15)에는 벽송(碧松)이 중창하여 벽송사라 하였으며,

한국전쟁 중 빨치산 야전병원 역할을 하였다가 소실된 뒤 곧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중앙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종루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원통전과 산신각이 있다.


선방 뒤 벽송사삼층석탑 앞에는 도인송과 미인송의 두 그루 소나무가 마치 벽송사 수호신처럼

벽송사를 내려다 보고 있어 인상 깊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74호인 벽송사삼층석탑 1기가 있다.



 



벽송사는 신재효의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서 무대가 되는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가루지기타령에서는 옹녀와 변강쇠가 눈이 맞아 지리산으로 들어가 함께 살게 된다.

변강쇠가 나무를 하는 대신 장승을 뽑아 불을 때자 장승의 원혼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장승 우두머리는 통문을 돌려

팔도의 장승을 모두 불러모아 변강쇠를 혼내준다는 줄거리이다.

(위키백과)



 


지엄은 서산 대사 휴정(1520∼1604년)의 직계 스승이다

청허휴정과 송운유정은 귀에 익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이다.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도총섭으로서 제자 사명대사와 함께 승병을 지휘했다.

벽송사는 승병 출정식을 거행한 장소이기도 하다.



 

 



 

범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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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당지엄영정(壁松堂智嚴影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6호

합천 해인사 박물관에 보관 - 19세기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35㎝, 가로 85㎝.

지엄은 서산 대사 휴정(1520∼1604년)의 직계 스승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모셔온 사진)

 


 

참선 중 출입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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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송선원

예부터 "벽송선원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라는 말이 있단다.



간월루


 

 

 

 


 

원통전 올라 가는 계단의 문양



원통전과 산신각

원통전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그 사찰의 부속전각에 모셔놓은 법당을 관음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그 사찰의 주존불로 봉안한 경우에는 원통전 또는 원통보전이라 하는데,

벽송사의 주법당은 원통전이다. 

 


도인송(道人松)

 

도인송(道人松)

빨치산 토벌과 한국전쟁에서 기꺼이 살아

기골이 장대하고 의젓하며

곁가지도 없이 위풍당당하게 솟아 공중에서 우산을 펼친 듯한 모습은 보통 소나무가 아니었다.  

 

 

 

 미인송(美人松)

서 있는 자리도 안정되지 못하고 옆에 있는 도인송에 비해 어울리기에는 너무 연약하고

허리 마저 굽어 보조대에 의지한 소나무를 미인송이라고 불러 다행이다.

 

 

벽송사 전경 

  



 


 

 

부도전

 

  

 








 

벽송사 전경과 스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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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공양 후

스님 세 분이 그늘 아래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어 사진을 담았다.


지금까지 많은 절을 다녔는데,

스님들이 밭에서 울력을 할 때 여럿이 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렇게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본 적 없어 내게는 뜻하지 않은 귀한 사진이다.

울력은

사찰에서 대중들이 모여 육체적인 노동을 함께 한다는 뜻이다.

 불교의 모든 것에서도 그렇듯이 울력은 노동에서조차도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울력이 삶의 방편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찰에서의 울력은 수행의 한 방편으로 중요한 일과(日課) 가운데 하나다.


참선 수행을 하고 있는 선종에서는 참선의 형식이 따로 있다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행(行) 주(住) 좌(坐) 와(臥) 즉, 거닐고 머물고 앉고 누워있는 그대로가 수행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아침 공양 전후에 전 대중이 도량을 청소하는 울력은 마당뿐만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번뇌라는 티끌을 함께 쓸어내는 수행의 과정으로 보고 있다.



휴식 시간이 끝났는지 스님들은 각자의 선방으로 향한다



벽송사를 떠나며


먼길 물어물어 왔던 벽송사였기에 더 머물러도 좋을 것이란 마음으로

떠남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았다.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도 모르는 벽송사는

 옛 터에 남아 있는 삼층석탑의 양식으로 미루어 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로 추정되며

조선 중종 15년인 1520년에 벽송대사로 불리던 장군 출신의 승려 송지엄이 중창한 뒤 벽송사라고 불렀다.


이 절의 중창자인 벽송지엄을 비롯해서 청허휴정(서산대사), 송운유정(사명대사)같은 기라성 같은 정통 조사들이

벽송사에서 수행 교화했으며,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략 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하여 대중교통으로도 천 리길을 와 벽송사를 돌아보고 다시 천 리길을 돌아가지만

그 옛날엔

지리산 깊고 깊은 칠선계곡에 자리하여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적막 속에 스치는 바람에 절 뒤 대나무 숲의 흔들림은 태풍 같았을 것이고,

 때론 고요 그대였을 것이기에 이곳에서 수행 교화하여 조선 선불교 최고의 종가를 이루었을 것이다.


설악산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계곡으로 손꼽히는 지리산 칠선계곡

초입에 자리한 백송사는 한국전쟁을 빼 놓고 얘기할 수 없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이 조선인민유격대의 근거지로 이용되면서 이 절은 인민군의 야전 병원으로 사용되었고

국군에 의해서 전소가 되었던 것을

본래 벽송사 자리보다 약간 아랫쪽에 삼단의 지형에 지금의 가람이 자리하고 있다.


인생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나

여행은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에 그 맛은 달고 쓰고 맵고 짜고 신맛이 난다.


그렇게 기다렸던 벽송사를 왔는데,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한 시간 만에 떠나는 맛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