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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남양주) 세계유산 및 사적 제209호 : 사릉(思陵)

 

세계유산 및 사적 제209호

사릉(思陵)

 

 



 

언제 : 2019년 3월 23일 토요일

어디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사릉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다.

 

 2018년 9월 17일 ~26일,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 세조 3년 단종복위운동 실패 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을 나와 광나루에서 뱃길로 여주 이포나루까지 이동하여 다시 육로로 영월 청량포까지 유배 여정과

청령포 유배 생활 그리고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고 묻힌 장릉까지

"단종애사"란 테마로 블로그에 올렸었다.


그리고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길에 오른 단종과 청계천 영도교에서 이별하고

동대문 밖 낙산 깊은 골 정업원에서 생활하다  단종이 사약을 받자 평생 81세를 살며 매일 조석으로 동망봉에 올라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던 동망봉과 정업원/청룡사를 방문하여 블로그에 올렸다.


그러나

마무리를 하려면    

정순왕후의 사릉을 방문하고 단종애사를 마치려 했는데, 첫 번째 찾아간 날이 월요일이라 휴관이 되어

금곡 사릉까지 갔다 되돌아오고,

오늘에야 

그것도 눈비가 내리며 꽃샘추위가 춤을 추던 날 사릉을 찾았다.    

 

 

 

 

 

 

 ▲

사릉 전통수목 양묘장

사릉은 왕릉보다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 사업소 묘포장으로 유명하다.



 


요즘처럼 전국이 당일 여행 코스가 되기 전,

서울 근교에서 경치 좋고

가족과 하루 나들잇길로 소나무 숲이 잘 보존되었고, 잔디가 좋은 곳은 조선왕릉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서오릉이나 동구릉에서 김밥 먹으며 즐겁게 놀았던 추억들이 있을 터인데

특히

 비운의 왕 단종과 정순왕후의는 TV에서 자주 방영되어 쉽게 찾았을 것이나

단종의 장릉은 영월에 있어 어려웠고,

사릉은 2013년 1월 1일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

사릉 재실

능을 개방했으니 재실도 당연히 개방을 했어야 옳은데 사릉 재실은 문이 닫혀있다.



 ▲

사릉 가는 길


11:57

오늘 오후에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집을 나설 때 우산을 챙겨 배낭에 넣었는데,

흐리던 하늘이

상봉역에서 춘천행 전철을 타자마자 비가 내리는데 제법 많이 내린다.

12:23

금곡역에 내리니 비는 우박과 함께 더군다나 세차게 내려 금곡역에서 눈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걸을 수 있는 거리인데 버스를 타고 사릉에 도착했다.



 ▲

사릉 입구

비가 많이 내리다 그쳤지만, 비가 완전히 멈추지는 않아 아무도 사릉을 방문하지 않고

나 혼자이다.






 

 




 


정순왕후는 남부러울 것이 없는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5세 때 한 살 어린 단종과 가례를 치러

왕비로 책봉되었다.


사실 이 결혼은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과 양녕대군이 멋대로 왕비를 고른 후 단종에게 거의 반 강제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의덕왕대비가 되면서 역경의 시련이 몰아친다.







 

창덕궁 돈화문  

17세 노산군과 18세 정순왕후 송씨는

1457년 음력 6월 21일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청계천 영도교(永渡橋)  

호송 대장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송씨 부인에게 호령했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휘하의 50여명의 금부 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워 송씨 부인을 막았다.


청계천 영도교는

귀양 가는 노산군과 폐비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다.


노산군과 헤어진 정순왕후는

동대문밖 깊은 골짜기에 있는 정업원/(지금의 청룡사)에서 시녀들과 함께 살면서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기도 했다. 하지만 스스로 생계를 부담하기 위해

제용감에서 심부름하던 시녀의 염색 기술을 도와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다.

당시에는 지치라는 식물의 뿌리를 이용해 비단에 물을 들였다.


정업원 터

6호선 창신역을 지나 비탈길을 오르며 청룡사를 찾아가는 길에 청룡사 바로 밑에 정업원 터가

자기를 기억하라며 나를 맞아준다.



삼각산 청룡사

단종이 죽자  정순왕후 송씨는 머리를 깎고 여승으로 평생을 이곳에서 지냈다는 절이다.



정순왕후가 염색일을 하던 紫芝洞泉(자주동샘)

정순왕후는 주변의 아낙들이 도와주거나 시녀들이 걷어오는 먹거리로 먹고 살았다고 하며,

세조가 미안한 마음에 내려준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하사품 물건들은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언제까지나 동냥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 터,

비단에 자주색 물을 들이는 염색일을 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때 물들이는 일을 했던 흔적을 찾아본다.

▼ 

 紫芝洞泉(자주동천)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샘.
이곳에서 염색일을 하며 지낸 것으로 보인다.


 

정순왕후가 염색업을 하던 골짜기를 자줏골이라 불렀는데,

 지봉 이수광 선생이 『지봉유설』을 저술한 초가삼간 비우당(庇雨堂)에 당시의 흔적이 있다.

정순왕후가 염색하던 곳을 자주동샘(紫芝洞泉)이라고 하는데

정순왕후가 이곳에 와서 단종이 억울하게 죽은 영월 쪽을 향해 명복을 빌며 비단 빨래를 하면

저절로 자주색 물감이 들었다고 한다.

 


東望峰(동망봉)

정순왕후가 매일 아침저녁 이곳에 올라 님 계신 영월, 동쪽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던 곳.

영조 41년(1771) 영조 친필로 이곳 바위에 동망봉이라 새겼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생기면서

흔적도 없어졌다.



 


세조는 말년에 정순왕후의 실상을 알고

궁핍을 면할 수 있는 집과 식량을 주겠다고 했지만 정순왕후가 그것을 고이 받을 여인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활하기 어렵다고 한들

왕후로서의 자존감을 꺾고 죽은 남편의 억울함과 열여덟에 홀로된 자신의 한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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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 전경

홍살문 가운데 박석을 깔아놓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은 향로와 어로로,

왼쪽 약간 높은길은 제향 때 향을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고 하며

오른쪽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고 한다.

 

 참고로

사릉 우측에는 다른 능에서 볼 수 없는 개인 묘지가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 주변의 터는 해주 정씨의 묘역이 자리하고 있는데, 단종의 누님인 경혜공주가 해주 정씨와 혼인하여

중종 16년(1531) 정순왕후가 죽자 해주 정씨 선산인 이곳에 무덤을 조성하고였기에

해주 정씨 묘들이 있다.








수라청터

제향이 있을 때 간단히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를 하던 곳이다.

2018년 발굴조사 및 문헌자료의 분석 결과 헛칸 - 헛칸 형태의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건축물임을 확인.

향후 복원 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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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방터

능을 관리하던 능지기가 임시로 머물렀던 곳이다.

2018년 발굴조사 및 문헌자료의 분석 결과 방 - 부엌 형태의 정면 2칸 측면 1칸을 확인하였다.

향후 복원 사업을 실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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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비각과 비문

정순왕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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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비가 내렸다가 그치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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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잖게 내리던 가랑비가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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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에 비를 피하며 담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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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비 내림이 옳은 일이다.


나름

비운의 단종과 정순왕후에 대해 "단종애사"라는 테마로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다.


햇볕이 나는 날이었다면

"이젠 두 분이 이별 없는 곳에서 웃으면서 행복하게 지내시는 표시"라 표현했을 터인데,

오늘처럼

거센 비가 내리니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사릉에 혼자 찾아온 나를 맞이하며 이젠 슬픔과 아픔은 빗물에 다 씻겨 가 버렸다."

마치

씻김 굿처럼 비를 내리시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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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 내리는 사릉

 


1999년에는 사릉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다.

이때 사용된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강원도 영월 장릉에 심어진 '정령송(精靈松)

정령송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의 능인 사릉에서 가져온 소나무







비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거진 송림은 부딪히지 않을 정도로 가지가 흔들리는데,

약 5천만 명이 대한민국 인구라는데 그 많은 사람 중 나 혼자 이 시간 정순왕후의 묘에 있다는 것.

의미를 두자면 대단한 의미이다.


봉분 위에 내리는 평화로운 비와 담담히 비 맞으며 우마처럼 말없이 끌려가는 헤아릴 수 없는 장송들의 모습이

불현듯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의 모습 같아 잠시 눈을 감았다.



 


 

 

산수유


 


비가 잧아들자

우산을 받고 사릉 솔숲을 혼자 걸으니

노란 개나리꽃이 비를 맞고도 뭐가 기분 좋은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긴다.


여태

한 번도 개나리꽃이 예쁘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여쁘다고 느껴진다.

꽃이어서 어여쁠까?

노란색이어서일까?


비가 완전히 그쳐

사릉을 나와 금곡역까지 걸으며 양지녘에 핀 봄꽃을 담았다.


 

제비꽃

▼ 

 






나는 아직 봄을 맞이하지 못하였는데,

 들에는 어느새 파릇파릇 새순이 자라 꽃을 피우우고, 산에는 진달래가 피었다고

지인은 사진을 보내왔다.


요즘

뚜렷한 이유 없이

 "왜 이렇게 사는가?" 라는 우물에 빠져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다.

사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 불가에선 왜 삶을 고해라고 하겠어.


나에게 봄이 오는 날은

 

답답한 가슴이 뚫리고, 목에 가시가 걸린 듯함도 사라져 시원하게 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사는 것은

"일체유심조(一 切 唯 心 造) -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라는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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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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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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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역에서 바라보니 조금전에 내렸던 비가 높은 산에는 눈으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