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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문경) 사적 제147호 및 명승 제32호 : 문경새재 영남 제1관 주흘관

 

명승 제32호 : 문경새재 영남 제1관 주흘관과 문경온천

(사적 제147호) 

 

 

 

언제 : 2019년 3월 3일 일요일

어디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근래 문경새재를 방문했던 때가 2007년 3월이었으니 약 12년만에 다시 찾는다.

 

다시 찾는 이유는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곳을 걸었지만,

문경새재길은 역사가 깃든 길이며, 시멘트 길이 아니라 흙길이며, 길 옆에는 개울물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송림이 우거져 솔바람과 솔향이 좋으며,

곳곳에 옛사람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어 아름다운 글을 읽을 수 있으며,

조곡관과 조령관에는 귀한 약수가 흘러 좋은 물 마시며

도보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2박 3일 예천 문경 여행 마지막 코스로

긴 겨울도 지났으니 주흘관에서 조령관까지 가서 충북 괴산 수옥폭포로 하산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올라가 봐야겠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

 

새재의 험한 산길 끝이 없는 길 嶺路崎山虛苦不窮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危橋側棧細相通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長風馬立松聲裏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盡日行人石氣中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幽澗結氷厓共白

눈 덮인 칡덩굴엔 마른 잎 붙어 있네 老藤經雪葉猶紅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到頭正出林界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西望京華月似弓

 

 

  

이번 2박 3일 문경과 예천 여행에서 문경 온천에

지인이 있어 이틀 밤을 묵으며,

아침 산책길에 나섰다.

  


 

 

문경온천 옆에는 신북천이 흐르며 강 건너 해발 200m 봉우리에는 팔각정이 있어

그 정자에서 내려다 보는 문경읍과 주흘산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

신북천의 철새들

 

 

 

 

이른아침 혼자 가파른 계단길을 올라 관산정에 섰다.

 

 

팔각정에서 본 문경읍과 주흘산

안타깝게도 미세먼지가 있어 주흘산이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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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산과 문경 



 

 

문경새재는 조령(鳥嶺)이란 이름으로

영남과 기호 지방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옛길이었으며 군사적으로 요새인 매우 중요한 곳이다.

 

문경새재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넘나들던 길로, 문경(聞慶)이라는
이름과 옛 지명인 문희(聞喜)에서 드러나듯 ‘경사로운 소식,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의미도 과거길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문경새재는
급제를 바라는 많은 선비들이 좋아했던 고갯길이었다.


조령(鳥嶺)이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새재는 '새 鳥'의 새와 '재 嶺'의 재가 합쳐져 '새재'라고 부르게 되었고,

영남(嶺南) 지방이라 할 때 충청도와 경상도를 나누는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영(嶺)의 남쪽에 있다하여

 영남(嶺南)이라 불렀다.

 

‘새재’라는 이름의 유래는 매우 다양하나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이 있고,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든 고개라는 뜻에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새재의 어원에는 많은 유래가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지리학자들이 말하는 ‘새로 낸 고갯길’이다.

 

 

 

 

 

 

 

 

 

 

 

 

 

 

 

 

 

작품명 : 휴식(Repose)

양성학 작 - Bronze - 2008

보부상은 전통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가 이루어지도록 중간자 역할을 했던 전문적인 상인을 말한다.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을 총칭하는 명칭이며, 보부상(褓負商) 또는 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하는데,

보상(褓商)은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고,

부상(負商) 상품을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였다. 


이들의 삶은 길위에서 시작되고 또 끝이 났다.

고단한 그들의 여정 속에서 고갯길 아래에서의 휴식은 얼마나 달콤했을까?



 

 ▲

문경새재 개천

조령산과 주흘산 계곡을 따라 문경새재를 넘게 되는데 두 곳의 물이 합류하여 흐르기 때문에

 여름 장마에는 엄청난 물이 내리겠네.



 

 

 

 

 

 

 

 

문경새재 - 제 1관 주흘관

 

새재는 임진왜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당시 영남내륙을 지나 올라오는 왜군과 맞선 신립 장군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지만 
크게 패하고 탄금대에서 투신했다.

전후 조정에서는 새재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이곳에 전쟁 대비 시설이 없음을 한탄했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서애 유성룡은 관문의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 후 선조 30년(1597)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자 일자형의 성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

새재길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고갯길에 얽힌

설화와 민요가 매우 다양하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세 개의 관문이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첫째 관문은 주흘관(主屹關)이다.
 숙종 34년(1708)에 설치되었으며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두 번째 관문은 조곡관(鳥谷關)으로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하였으며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관문은 조령관(鳥嶺關)으로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Daum백과] 

 

 

주흘관(主屹關)

 ▲

주흘관(主屹關)

  ▼ 




 

제 2관문 조곡관으로 가는 중,

거대한 문경새재오픈세트장이 있어 그곳을 둘러보고 조령관까지 다녀오려면 일정에 지장이 생겨

옛 사진을 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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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오픈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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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담은 사진

10년 전에 담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