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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대구+경북 여행

(문경) 사적 제147호 및 명승 제32호 : 천혜의 요새 조곡관과 도요토미의 조선침략 명령서

 

사적 제147호

명승 제32호 : 문경새재 주흘관에서 조곡관 -2

 토요토미의 조선침략 명령문서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란 말은

외양간을 허술하게 지어 도둑이 소 훔쳐 간 뒤에야 허술한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한민국 국민은 대체로 일본을 좋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와 일본이 외교 문제로 다툴 때마다 분통이 터지는 것은

 임진왜란 때 위정자들이 현명하여 지리적 요충지인 문경새재에서 왜군을 효과적으로 막았거나 격퇴 했다면

일제 강점기의 치욕과 오늘날 눈에 보이는 억지 외교 문제는 그들의 생리상

지금과는 완연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 함대를 무찔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물길을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주흘관 = 영남제일관

 

 

설렌다는 말이 좋다.

이 나이에 가슴 설렐 일이 그리 많지 않지만, 늘 가슴엔 다시 한문경새재 다녀올 기회가 있으면

조금은 세련되게 걷고 싶었다.

 

옛날에 보았던 나무들과 돌 그리고 고봉들이 여태 잘 견디고 있는지

먼지도 일지 않은 흙길은 조금 달라졌는지

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내가 궁금해하며 찾아가는 설렘.

 

영남 제1관 주흘관을 들어서 조령산 봉우리 아스라이 높아 좋아 보이고,

계곡물 내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내 숨소리마저 가볍게 한다. 

 

 



제1관문(주흘관)에서 제2관문(조곡관)까지가 3킬로미터이고

제2관문에서 제3관문(조령관)까지가 3.5킬로미터로, 천천히 걸으면 왕복 4시간 정도 걸린다.



 

 

연휴라서인지

제법 많은 사람이 문경새재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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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틀 바위

'지름틀'은 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다.

이 바위는 기름틀의 누름틀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시대의 여행자들은 어떻게 숙식을 해결 했을까?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길을 떠나면 먹고 자는 일이 큰 문제였기에

 나라에서는 관리들을 위해 역이나 원 등의 숙박 시설을 마련했지만, 백성들은 점이나 주막, 객주 등을 이용했다.

 ‘역’은 왕명이나 공문서를 들고 가는 관리들이 묵고,

 ‘원’은 역과 달리 공공임무를 띤 관리뿐만 아니라 상인이나 일반 여행객들도 이용했다.

 그러나

원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쇠퇴하고 대신 주막이 번창하게 되었다. 



 

 




 

무주암

누구든지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었다.

길손들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의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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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

타원형으로 된 이 바위는 긴쪽이 약 5m, 짧은쪽이 약 4m로서 지금은 새재를 찾는 관광객의 쉼터이지만,

옛날에는 도적들이 숨어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덮치기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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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재현을 하였으면 보존도 잘 하고 실제 주막처럼 보여야 하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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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행렬이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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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정(交龜亭)과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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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정(交龜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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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정(交龜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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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귀정에서 바라본 조령산의 산세







용추폭포





교귀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용추폭포 위 바위는

TV 사극 '태조왕건'에서 궁예가 최후를 맞이한 촬영장소로도 이름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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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구리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있어 바위에 앉으면

물속의 꾸구리가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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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들강아지

 

 

소원 성취탑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 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되며 아들을 못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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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1592년 4월 14일 왜병 부산상륙 침략,

4월 27일 조령을 아무런 저항 없이 넘어와 4월 28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의 조선 관군 (8,000 명)이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패당한다. 


참고로 삼도 순변사로 임명받은 신립장군은

선조의 넷째아들 신성군의 장인으로 선조와는 사둔간이다.


1592년4월13일 대마도 이즈하라에서 왜 병사 25,000명출발,

4월14일 부산다도착,

부산진성 함락, 4월 15일 동래성 함락, 

1,2군으로 갈라져 1군은 고니시 우키나가, 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끌고 

1군은청도 청도  밀양 대구 

2군은 경주 영천 군위로 진격

4월 18일 밀양성 함락,

 1,2군 문경에서 합류 -4월 27조령 통과,

4월 28일 탄금대전투, 

5월2일 2군한강 접근

 5월3일 1군 한양에 입성 왜군에게 점령당함(부산침공 20일째)

 6월 15일 평양성 함락

  5.월 7일 옥포에서 이순신이 왜군함대 격파 첫승전.

12월 명나라 이여송의 4만의 원군 압록강을 건너 참전함.

1593년 8월 일본군 철군시작, 명군 철군. 1596년 8월 일본군 재 침공,

1598년 9월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왜군 철군시작,

11월 이순신의 노량진 해전으로 완승( 총 23전 23승)

  8년에 걸친 전쟁

 



임진왜란 주범 도요토미, 조선침략 명령 문서 첫 발견 

2019년 3월 28일 아사히 신문


임진왜란의 주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1537~1598)가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을 명령한 공문서가 처음으로 발견됐다고 아사히신문이 28일 보도했다.

이 문서는 도요토미가 자신의 오른팔이자 조선 침략에 선봉에 섰던

무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1562~1611) 앞으로 보낸 것으로, 3월23일이라는 날짜가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13일 직전에 보내진 것으로 추측된다.


문서는 족자 형태로 가로 125.5㎝, 세로 21.5㎝의 크기이며,

용 문양의 도요토미의 인장이 찍혀있는 것과 종이 질 및 형태 등을 볼 때 진품으로 판명됐다고 한다.


문서에는 도요토미가 가토에게

 "(제1군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8~1600) 등에게 조선 출병을 명령했기 때문에,

너도 출진(出陣·싸움터로 나아간다는 뜻)한다.

이국(조선)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여겨지지만, 절대로 방심하지 않도록"이라고 적혔다.

고니시는 임진왜란의 선봉에 섰던 무장 중 한 명이다.

【서울=뉴시스】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자신의 오른팔이자 임진왜란의 선봉에 섰던 무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에게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을 명령한 공문서(사진)가 발견됐다. (사진출처:아사히신문 홈페이지 캡쳐) 2019.03.28.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자신의 오른팔이자 임진왜란의 선봉에 섰던 무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에게

조선 침략을 위해 출병을 명령한 공문서(사진)가 발견됐다.

 (사진출처:아사히신문 홈페이지 캡쳐) 2019.03.28.


문서를 공개한 것은 아이치(愛知)현 가리야(刈谷)시에 있는 시 역사박물관으로,

박물관 측은 조선 침략을 명령한 이 같은 문서의 내용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고문서에도 있지만,

실물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조곡관


조곡관은 천혜의 요새지이다.


왜군이 이 천혜의 요새지를 아무런 저항 없이 하룻만에 통과하였다는 것이

원통하기 그지없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시니 유끼나가가 문경새재를 통과하기 위해 경주에서 북상하는 카토요 키요마사의 군대와 합류

* 가등청정=카토요 키유마사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 성주였음

신립장군은

아래 장수들이 문경새재 왜군을 막자는 의견에도 문경새재에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개활지 탄금대에서 왜군과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었다.

 

임진왜란 당시 파견 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은

문경새재의 지형을 보고 "이 험준한 고개를 지킬 생각을 못 하다니 신 총병도 참 지략없는 사람이다."하고

신립을 비웃었다고 한다.

신립이 충주 탄금대가 아닌 이 곳에서 결진하여 매복했다면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더 효과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영남 제2관 = 조곡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