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端宗哀史) - 2. 단종의 유배길
보물 제1738호 살곶이다리
언제 : 2018년 9월 17일 월요일
어디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58번지
살곶이다리는 노산군(단종)이 영월로 유배가는 길에 지났던 다리이다.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에서 내려
중랑천 변으로 내려가는 이정표를 따라가니 담벼락의 덩쿨나뭇잎이 가을을 색칠하고 있다.
지난여름은 얼마나 지루하고 고생했던가!
기상관측 이래 111년 만의 폭염과 한 달이 넘도록 열대야로 돈 있는 자는 에어컨 틀고 시원하게 지냈겠지만,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폭염에도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열대야로 잠도 설쳐
사는 것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그랬던 날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어느 하루 아침에 조석 간 서늘해지더니 이젠 평상의 기온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지만
야속하기도 하다.
“노산군(魯山君)이 현릉(顯陵)을 배알(拜謁)하고 돌아오니,
임금이 살곶이[箭串]에서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고 호가(扈駕)하는 군사들에게 차등을 두어 술을 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2권, 1년(1455 을해)
현릉은 지금 동구릉에 있는 노산군의 부친인 문종과 현덕왕후가 묻힌 곳
여자 두 분과 남자 한 분의 외국인이 살곶이다리를 건넌다.
핸드폰으로 검색한 후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보니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다리를 직접 건너며 역사 체험을 하는 듯 보인다.
그 모습이
달리 보이지 않은 것은
나 역시 외국에 나가면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편편한 돌은 일부러 정으로 흠집을 내놓은 것을 보니
비나 눈이 내리면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함인듯 하여 우리 역사에서 쉽게 찾기 힘든 선조들의 배려가 눈물 겹다.
서울 도심을 흐르는 청계천이 이곳에서 중랑천과 합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든다.
노산군은
청계천에서 폐비 정순왕후와 이별하고
중랑천 살곶이다리를 건너
다음날(6월 22일)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로 이동하게 된다.
청계천
한양의 정신적 기둥인 북악산과 인왕산의 샘에서 흐르기 시작한 물줄기다.
이 물이 한양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고 그들이 배설한 오물은 천변을 따라 청계천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 더러운 물은 다시 한강으로 흐른다.
'개천(開川)'이라고도 함. 총길이 5.84km, 산책로 12.04km, 하루 물 소비량 120,000톤.
청계천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서울 도심으로 모인 물길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자연상태의 하천이었던 청계천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시대부터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07년 청계천의 바닥을 넓히고 둑을 쌓는 등 처음으로 청계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거도감(開渠都監, 이듬해 개천도감으로 명칭 변경)을 설치하고,
다음 해부터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으며 광통교·혜정교 등 돌다리를 만들었다.
‘개천’이라는 이름이 ‘청계천’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방치되어 있던 청계천은
1925년부터 종로구 신교동에서 도렴동까지, 1937년에는 태평로에서 무교동 구간이 복개되었다.
이후 1955년 광통교 상류를 시작으로 1970년∼1977년 청계 8가에서부터 신답철교까지 또다시 복개되었다.
1960~70년대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청계천은
자연환경과 역사문화를 복원한다는 취지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복원 구간은 태평로에서 신답철교까지이며,
공사는 2003년 7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약 3,900억원을 투입하여 진행되었다.
청계천 복원으로 청계천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
살곶이다리 위에서 본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수하여 한강으로 흘러가는 풍경
△
살곶이다리를 건너
반대편에서 본 살곶이다리와 한양대학교 캠퍼스
본래 살곶이다리는 64개 돌기둥이며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된 다리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경기를 대비해 도로확장공사 중
살곶이다리 북쪽 교대와 입구 교각 2개소가 매몰되어 2018년 6월 발굴 복원하였다.
살곶이다리가 한양대학교 교정 쪽으로 향해 있고,
살곶이다리 중간 즈음 마무리가 된 것을 보면, 조선시대 중랑천 넓이는 지금의 절반 정도인 듯 싶다.
살곶이다리의 길이는 76m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다고 한다.
살곶이다리
성동구 사근동 102번지 남쪽 현재 성동교 동쪽에 위치해 있는 돌다리로서 중랑천에 놓여 있다.
살곶이 앞에 있다 하여 살곶이다리, 또는 살꽂이다리라고 하였고
한자명으로 전곶교(箭串橋)라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이방원의 등극을 부정하였다.
그후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를
태종이 이곳 중랑천 하류 한강가에서 천막을 치고 아버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활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하고 화살이 땅에 꽂혀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살꽂이 혹은 살곶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은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에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허락하여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兩殿: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나자,태종이 면복(冕服-국왕이 제례(祭禮) 때 착용한 관복)을 입고 나아가 뵈었는데,
태조가 보고는 노한 얼굴빛으로 가지고 있던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가렸으므로 화살이 그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이르기를,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이에 나라의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려 할 때에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들어 헌수할 때에 친히 하지 말고 마땅히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 방망이를 찾아내어 자리 옆에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즉
이런 역사적인 다리를 오늘에 이르러 노산군은 청게천 영도교에서 사랑스런 왕비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하고
살곶이다리를 건너며
태조와 태종 즉 단종의 고조와 증조할아버지들의 서슬퍼런 사건들을 떠올렸을까?
아니면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며
어디선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을 폐비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다가 다리를 건넜을까?
이 다리는 조선시대 다리로는 가장 길었으며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12월 23일 보물 제1738호로 변경 지정되어 관리중이다.
외국인 남자 둘이 전철역 방향에서 다가와 이곳 저곳을 살펴 보더니 사진처럼 살곶이다리를 건넌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독일에서 왔다며 서울 소개 책자를 보고 살곶이다리를 찾아 왔단다.
오늘은
창덕궁 돈화문을 나선 노산군과 정순왕후 송씨가 청계천 영도교에서 살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이별한 뒤,
노산군은 살곶이다리를 건너 오늘밤 머물 화양정으로 향한다.
다음 편은
화양동 화양정과 광나루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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