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애사(端宗哀史) - 3
단종의 유배길
화양정(華陽亭)에서 하룻밤 머물다
언제 : 2018년 9월 17일 월요일
어디 : 서울특별시 성동구 화양동 화양느티나무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어린이대공원역에 하차하여
화양동주민센터를 찾으면 그 앞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는데, 이곳이 노산군이 유배길에 하룻밤
머물다 간 화양정 터이다.
화양정은
1911년 7월 21일 큰 벼락을 맞아 무너져 그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에서 팔작지붕으로 된 화양정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화양정 옆에 서 있던
높이 28m, 둘레 7.5m, 수령 700여 년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화양정 터임을 알려 준다.
인천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2시간이 넘게 걸려 어느덧 정오가 지나 집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들며,
12세 어린 왕에서 17세 청년으로 자랐으나 험한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유배길에 오른
자신의 처지를 통곡하며 한탄하였을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보물 제1595-1호 -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663년(현종 4) 허목(許穆)이 지은 목장에 관한 지도책.
△
화양정 터(華陽亭 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중랑천 변 일대를 군사용 또는 파발용 말을 기르는 목장으로 만들었다.
살곶이 목장이다.
세종 14년(1432)에 이 목장을 관망하는 정자를 세웠다.
지금의 광진구 화양동 110번지 32-34호 일대이다.
그리고
서경(書經) 주서(周書) 무성편(武成篇)에 나오는 고사를 인용하여 정자 이름을 화양정으로 지었다.
주(周)나라의 무왕은 은(殷)나라를 정벌하고 나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은 화산의 남쪽으로 돌려보내고 소는 도림(桃林)의 숲으로 풀어 놓았다."라는 고사의
귀마우화산지양(歸馬于華山之陽)에서 "화양(華陽)"을 따온 것이다.
화양정은 군사 훈련을 사열하는 곳이나 때로는 역사의 사건을 간직하기도 하였다.
세조 3년(1457) 6월 21일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강원도 영월로 귀양 가던 중 하룻밤을 묵었던 곳이 화양정이다.
백성들은 단종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회행정(回行亭)" 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단종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해 10월21일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고종 19년(1882)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가 변복을 하고 난을 피해 장호원으로 내려갈 때,
이곳 화양정에서 잠시 쉬어갔다고 한다.
뒷날 명성황후가 환궁하자, 사람들은 "정말 화양정이 회행정이 되었다." 며 감격하였다고 한다.
화양정은 사각형의 정자로서
기둥 둘레가 한 아름이 넘었으며, 내부가 100여 칸 이상으로 그 규모가 웅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11년 7월21일 큰 벼락을 맞아 무너졌다.
영상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살곶이 목장을 그린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에서
팔작지붕으로 된 화양정이 그려져 있다.
△
화양정 그림
진헌마정색도(進獻馬正色圖)
단종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문 이유는
세조가 환관 안노(安璐)를 시켜서 노산군을 전송하기 위해 화양정에서 약간의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세조실록 1457년 6월22일)
내시 안노는 단종에게 술을 권하며
성삼문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고 있노라고 넌지시 말했다.
세조가 혈육의 정으로 전송 연을 베푼다고 생각했던 단종은 안노의 말이 너무나 괘씸하여,
술잔을 들어 안노의 면상을 때리고 말았다.
화양정에서 하룻밤을 지낸 단종 일행은
6월 22일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내려가 6월24일에 여주의 이포나루에 닿아
육로로 6월 28일 영월 청령포에 도착했다.
△
▽
1911년 화양정은 벼락을 맞아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다.
본디
배롱나무꽃은 한 여름에 피었다가 9월 중순이면 지는데, 이곳 배롱나무꽃은 아직도 꽃색이 곱다.
마치
단종의 통곡소리와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
맥문동꽃
굵은 땅속줄기에서 곧추 서는 잎들이 나온다.
잎은 길이 30~50㎝, 너비 0.8~1.2㎝이며 잎끝은 밑으로 숙이고 있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고 푸른색을 그대로 지니기도 한다.
꽃은 연한 보라색이며 5~6월에 잎 사이에서 길게 만들어진 꽃자루 위에 무리지어 핀다.
그늘에서 무리지어 자라기 때문에 뜰의 가장자리에 심고 있으며, 가물어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잘 견딘다.
때때로 땅속줄기가 흰색 덩어리로 되기도 하는데,
봄·가을에 캐서 껍질을 벗긴 다음 햇볕에 말린 것을 맥문동이라고 하여
한방에서 강장·진해·거담제·강심제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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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살곶이다리를 가야 하는데
암만
점심이 늦을 듯 싶어 집에서 준비해온 잡채와 커피로 점심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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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정 터 배롱나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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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시인 모윤숙이 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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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과 동교 전경"
이태호 명지대 초빙교수 ‘한양 도성과 동교 전경’(2016)
살곶이다리를 건너면 동쪽 너른 땅에 목장터가 보이고, 중랑천을 두르고 아차산을 세운 기가 막힌 땅에
화양정을 세웠다.
1457년 6월 21일
노산군 일행은 화양정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6월 22일
여주 이포나루까지 배를 타고 이동할 목적으로 광나루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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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 풍경/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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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 표지석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하차- 한강호텔을 지나 광진정보도서관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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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廣津)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1759)
천지간의 좋은 풍경 강호상에 들어오는데 천 리나 넓은 안계(眼界)가 수묵화를 펼쳐놓았구나.
갈매기 날아가는데 수면이 밝았다 어두웠다 푸른 하늘 저 끝엔 산이 보이다 말다 하네.
오래된 관청의 소나무 국화는 옛날 선비 서성대던 길이요,
몽리의 뽕나무 삼밭은 오랜 옛날의 한 마을이라네.
한 걸음 두 걸음 보고 또 보노라니 벌써 해 서산에 지려는데
비 지난 뒤 꽃 기운이 젖처럼 윤기 흐르누나.
<광진촌서만조(廣津村墅晩兆)>
조선의 대표적 문인 서거정(徐居正)이 예찬한 광진촌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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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에서 구리 방향의 한강
1457년 6월 22일 노산군과 일행은 광진을 출발하여 배로 이 강물을 따라
여주 이포나루에 내려(혹은 원주 흥원창),
이후에는 뭍으로 영월로 이동하여 6월 28일 청령포에 도착한다.
그러나
단종 유배길의 행적은 세조 실록에 화양정까지만 찾을 수 있고,
그 이후
광나루에서 여주 이포나루(혹은 원주 흥원창)를 지나 신남 싸리치까지 과정은 정확한 자료가 없고
야사로 떠도는 불확실한 자료라 다루기 어려울 것이다.
어쨌든
돌아오는 추석 연휴에는 여주 이포나루터에서 영월 청령포까지 여행길에 올라
사진을 담아 올리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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