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단종애사(端宗哀史) - 1. 단종의 유배길(돈화문 - 영도교 - 동망봉)

 

단종애사(端宗哀史) - 1

 

단종 유배길 

창덕궁 돈화문 - 청계천 영도교 - 정업원터 - 청룡사 - 동망봉

 

 

 

 

언제 : 2018년 9월 17일 월요일

어디 : 청계천 영도교 - 동망산 청룡사 - 동망정

 

 

단종은

1452년 5월, 12세 어린 나이에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 제6대 왕이 되어 

1454년 1월, 14세 때 자기보다 한 살 많은 15세 정순왕후 송씨와 혼인 후, 

살벌한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1455년 숙부인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으로

금성대군(세종의 여섯 째 아들) 집에 사실상 감금 생활을 하던 중,

1456년 사육신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의 길을 떠난다.


세조 3년 1457년 6월 21일

17세 노산군(단종)은 18세 정순왕후 송씨와 함께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청계천 영도교에서 피눈물 흘리며 이별한 뒤,

화양정에서 하룻밤 머물고,

6월 22일

노산군은 화양정을 떠나

 광나루에서 뱃길로 머나먼 영월 땅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 청령포에서 험한 생활을 하던 중,

홍수로 청령포에서 영월 객사인 관풍헌에서 지내다가

 경상도 순흥(영주)에서 귀양 생활을 하던 숙부 금성대군에 의한 단종 복위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노산군은 다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1457년 10월,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는다.


한편

 정순왕후 송씨는 청계천 영도교에서 떠나는 노산군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다가,

동대문 밖 낙산 깊은 골 청룡사에서 머물다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자 매일 조석으로 동망봉에 올라와서 동쪽 영월을 바라보며,

평생 81세를 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9월 17일

 

무더위 사라진 하늘 청명하고 흰 구름 두둥실 흐르는 날,

창덕궁 돈화문에서 하룻밤 머문 화양정과 한강 뱃길 출발지인 광나루까지 여행길에 올랐다.

 

광나루를 떠난 이후 행적은

정확한 기록은 없고 정사와 야사가 뒤섞여 혼란스럽지만,

추석 연휴에는

광나루에서 강원도 영월까지 단종의 유배길을 다녀 보려 한다.

 

 

 

창덕궁 돈화문

 

17세 노산군과 18세 정순왕후 송씨는

1457년 음력 6월 21일 한여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창덕궁 돈화문을 나섰다.

 

‘정치권력이란 부자지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데 대하여

백성들과 올곧은 신하들에 의하여 자신의 왕위와 신변의 위협을 느낀 세조는 시급히

정권을 안정 시켜야할 필요성에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 7일 만에 도착 시킬 정도로 단종유배를 매우 서둘렀다.

 

세조실록에는

 “상왕(上王)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궁에서 내보내 영월(寧越)에 거주시키니,

의식(衣食)을 후(厚)하게 봉공(奉供)하여 종시(終始) 목숨을 보존하여서 나라의 민심을 안정시키도록 하라”하고,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에게 명하여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날씨가 매우 더운 음력 6월에 머나먼 유배지로 호송(護送)하게 하였던 출발지가

창덕궁 돈화문이다.

 

단종의 유배행렬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어득해(魚得海), 군자감 정(軍資監正) 김자행(金自行)·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홍득경(洪得敬)이 이끄는 50명의 군사가 호송(護送)하였다. 

이 호송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종

단종


  

단종(端宗, 1441년 ~ 1457년)

 세종의 첫째 아들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1441년(세종 23)에 7월 23일 진시(辰時)에 경복궁

동궁이 거처하는 자선당(資善堂)에서 단종이 태어났으며,

이름은 홍위(弘暐)이다.

 

그러나 현덕왕후 권씨는 단종을 낳고 사흘 만에 죽었고, 

 문종이 더 이상 세자빈을 들이지 않은 탓에 단종은 모후 없이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의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으며,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라 조선 제6대 왕이 되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불과 12세였다.

 

 단종은 1454년(단종 2) 1월 14세에

 송현수(宋玹壽)의 딸을 왕비로 맞았는데,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는 당시 15세였다.

 단종은 아직 삼년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혼사를 치를 수 없다며 여러 차례 거절했으나

1453년 음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끝내 이를 관철시켰다.

 

단종과 정순왕후 사이에는 후사가 없다.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년~ 1521년 음력 6월 4일)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세종 22년(1440)에 태어나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남편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면서 군부인(君夫人)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는데,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또한

폐비 정순왕후 송씨 집안은 역적의 집안이라고 하여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

 

단종이 사사된 후

정순왕후는 64년이나 더 살아 1521년 6월 4일 8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6명의 임금이 바뀌는 것을 지켜보면서

한살 아래의 남편 단종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나날을 보내야했다


그녀의 능인 사릉의 소나무는 동쪽 방향으로 굽는다는 전설이 있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Daum백과]  

 


 


두 사람이 이별한 다리는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로 불렸지만,
영도교(永渡橋)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영원히 건너간 다리, 영영 이별한 다리라는 뜻이다.



永度僑(영도교)


호송 대장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송씨 부인에게 호령했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시오!

노산군은 오늘 밤 안으로 양주까지 가야 하오!

휘하의 50여명의 금부 나졸들이 창을 엇갈려 세워 송씨 부인을 막았다.


영도교는 귀양 가는 노산군과 폐비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다.


당시 청계천에 놓인 다리 가운데 가장 동쪽에 있던 다리로 정순왕후로서는 자신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귀양 가는 낭군을 배웅한 셈이다.

 

부인, 부디 자중자애하시오!

전하, 부디 옥체를 보존하소서!


두 사람은 이후 이승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영도교를 건너면

더 이상 사랑하는 임을 볼 수 없다는 말이 전해져 사람들은 '영원히 이별하는 다리'라는 뜻의
'영이별교'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Daum백과] 


 

영도교에서의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별 행차 재현 모습

 

광화문 방향

 

영도교 위에서 본 청계천(淸溪川)

 

중량천 방향


청계천(淸溪川)

상류는 경복궁 서북의 백운동 부근을 흐르는 청풍계천(淸風溪川)이며,

지류인 옥류동천(玉流洞川)ㆍ누각동천(樓閣洞川)과 남산에서 발원하는 3개의 지류를 합친다. 


깨끗한 물은 이렇게 인간을 거쳐 가며 더러워진다.

그 온갖 더러운 것이 모인 장소가 청계천 하류다.

그래서 조선 땅에서 부와 권력을 움켜쥔 사람들은 북악산이나 인왕산 주변의 정기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니 그곳에서 가난하게 산 선비의 한탄쯤은

남산 아래 청계천 주변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서민에겐

한낱 배부른 자의 엄살에 불과할지 모른다. 

 

 

청계천과 영도교

노산군과 정순왕후 송씨가 피눈물 흘리며 생전 다시 못 볼 생이별을 하던 그 날도

오늘처럼 청계천엔 물이 흘렀을 것이다.

 

청계천은 동쪽으로 흘러 살곶이다리 근방에서

중랑천과 합수하여 응봉산 아래에서 단종이 사약을 든 영월에서 흘러온 한강과 합수해 흐르다

파주의 임진강과 합수하여

남한과 북한을 경계하며 서해로 흘러간다.

 

 

동망봉

청계천 영도교를 떠나 정순왕후 송씨가 죽을 때까지 머물렀던 청룡사를 찾아가는 길에 본

 동망봉

 

 

정업원 터

6호선 창신역을 지나 비탈길을 오르며 청룡사를 찾아가는 길에 청룡사 바로 밑에 정업원 터가

자기를 기억하라며 나를 맞아준다.

 

 

 

 

정업원이란

고려·조선 시대 도성(都城) 내에 있었던 여승방(女僧房).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164년(의종 18) 고려 의종이
정업원에 이어(移御:임금이 행차함)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정업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양에 도읍을 건설한 조선 초에는 개경의 정업원을 옮겨 건립하였다.


 정업원의 소재지에 대해서는

응봉(鷹峰) 아래 창경궁(昌慶宮)의 서쪽이었다는 설과 동대문 밖 동망봉(東望峰) 아래였다는 주장이 있다.

동망봉 아래에 1771년(영조 47)영조가 세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가 남아 있기 때문인데

 정업원이 동망봉 아래 있었다는 설은

단종의 비 송씨가 동망봉에 있었던 사실과, 또한 그가 정업원 주지로 있었던 사실이 얽혀서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daum백과 참조)

 

 

정업원 비각

문이 잠겨 영조가 눈물을 머금고 쓴 비석을 볼 수 없었으나 현판을 걸려 있어 담았다.

 

 

영조 친필

전봉후암여천만년(前峯後巖於千萬年)

앞봉우리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삼각산 청룡사

단종이 죽자  정순왕후 송씨는 머리를 깎고 여승으로 평생을 이곳에서 지냈다는 절이다.

 

마침

이곳의 비구니(比丘尼)께서 내게 다가와 청룡사와 정순왕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지금이야 개발되어 산에도 아파트가 들어섰으나

1970년도까지도 청룡사 앞에는 모두 절의 밭이었고 깊은 골짜기였단다.

 

 

청룡사 대웅전

이곳에서 18세 폐비 정순왕후 송씨는

평생을 단종에 대한 그리움을 식히며 안녕을 빌었을 것을 생각하니

콧등이 아리고 시야가 흐려진다.

 

 

우화루(雨花樓)

 

 

비구니

청룡사와 정순왕후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전화가 와 더 대화를 못하고 나는 동망봉으로 걸음을 옮긴다.

 

 

심검당

 

 

청룡사에서 본 동망봉


정순왕후가 염색일을 하던 紫芝洞泉(자주동샘)

정순왕후는 주변의 아낙들이 도와주거나 시녀들이 걷어오는 먹거리로 먹고 살았다고 하며,

세조가 미안한 마음에 내려준 집에는 들어가지 않고 하사품 물건들은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언제까지나 동냥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을 터,

비단에 자주색 물을 들이는 염색일을 하며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

때 물들이는 일을 했던 흔적을 찾아본다.

 

 紫芝洞泉(자주동천)
정순왕후가 비단을 빨면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슬픈 전설이 어려있는 샘.
이곳에서 염색일을 하며 지낸 것으로 보인다.

 




동망봉 돌탑

청룡사를 나와 동망봉에 세워진 동망정을 찾아가는데, 보기보다 경사가 심하다.

 

 

동망정

東望峰(동망봉)

정순왕후가 매일 아침저녁 이곳에 올라 님 계신 영월, 동쪽을 바라보며 명복을 빌던 곳.

영조 41년(1771) 영조 친필로 이곳 바위에 동망봉이라 새겼다고 하나 일제강점기 때 채석장이 생기면서

흔적도 없어졌다.

바로 옆에는 동망정을 세웠다.

 ▽ 

 

 

동망정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니

오전에 다녀왔던 멀리 광나루 - 화양동 느티나무 - 중랑천 살곶이다리 -청계천 영도교가 조망되고

 멀리 롯데빌딩도 조망된다.

 

 

동묘

중국 후한의 장수인 관우를 신앙하기 위해 건립한 묘당이다.

《증보문헌비고》 <예고(禮考)>를 보면,

임진왜란 때 가끔 관우의 혼이 나타나 명나라 군사를 도왔으므로 사기 진작을 위해 관왕묘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란 후 민심 이반을 우려한

당시 기득권층이 중화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적 통치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Daum백과] 


2013년 4월 27일 제 블로그 서울여행기 - 서울동관왕묘 참조

 

 

 

 

단종이 12세 어린 나이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으로 등극하여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1457년 6월 21일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폐비 정순왕후 송씨와 함께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청계천 영도교에서 다시는 못 볼 이별을 하고,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1440년~ 1521년 음력 6월 4일)는 동대문 밖 낙산 뒤 깊은 골 청룡사에서

평생을 단종을 그리워하다

81세 별세하여 지금의 사릉(思陵)에 묻혔다.

 

단종은 청계천을 건너고

중랑천 살곶이다리를 건너서 화양정(지금의 화양동 느티나무 인근)에서 하룻밤을 머물고,

 6월 22일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 이포나루에 닿아 - 혹은 원주 흥원창에 내렸다고 함-

이후 험한 산길로 영월 청령포에 6월 28일에 당도한 7일간 유배길이었으나,

이후

자신이 어떻게 될것인지 알 수 없는 유배길이었으니 얼마나 멀고 험한 길이었을까?

 

다음 편에는

영도교에서 이별한 노산군은 중랑천 살곶이다리를 건너 화양정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6월 22일) 광나루에서 배를 타는 과정을 담는다.

  

본래

 단종애사(端宗哀史)라는 말은 이광수(李光洙)가 지은 역사소설 제목으로,

1928년 11월 30일부터 1929년 12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 총 217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단종이 태어나서 영월에서 사망할 때까지의 연대기소설(年代記小說)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