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8호 - 회암사지의 중요 문화재
회암사지 서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말, 조선 초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으로 추앙되는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부도와 탑비(塔碑)가 있다.
이와 같이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고승들이 회암사에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도
회암사가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위상을 알 수 있다.
흔히 삼화상(三和尙)으로 불리는
지공, 나옹, 무학의 사상과 저술은 그들의 문도(門徒)와 계승자를 통해서 당시 사회에 널리 전법되었으며,
이는 현재 조계종(曹溪宗)으로 법통이 이어지고 있다.
그늘도 없는 뙤약볕 회암사지를 일 년 중 가장 더운 대서에 둘러보고
절터 근방에 있다는 지공, 나옹, 그리고 무학대사 부도 및 중요문화재를 찾아
회암사 일주문을 지난다
△ 회암사지 전망대와 소나무
△
도봉산
도봉산이 보이는 것은 한양이 멀지 않다.
어쩌면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머물렀던 여러 이유 중 속마음은 궁궐이 그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
회암사 일주문
뙤약볕에서 나와 회암사 가는 산길에 물소리가 들린다.
세수를 하면 좋겠더만.....
1821년(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어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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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한때는 그토록 영화롭고 화려했던 곳이 이제는 잡초가 우거지고 주춧돌이 잡초에 묻혀 있다.
회암사지에서 천보산 정상쪽으로 약 10여 분 걸으면
회암사를 창건한 지공, 지공의 제자인 나옹, 그리고 나옹의 제자였던 무학의 세 승려부도와 비를 중수하고
오른쪽에 회암사의 옛절 이름을 계승한 회암사가 있다.
부도는 평지에 사리를 모셔 참배객이 조의를 표시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의 부도는
천보산 능선을 따라 천하의 명당 혈에 지공 · 나웅 · 무학대사 부도가 100m 간격으로 세워져 있다.
회암사지 가까이에 부도를 두지 않았던 것은
앞으로 닥칠 회암사의 환난을 꿰뚫어 보고 운명을 내다 본 것일까?
무학대사의 부도를 모신 곳은 최고의 명당 혈인데
주위에 산도 물도 풀도 노송나무도 무학대사의 부도를 향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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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공선사 부도비와 부도 및 석등이 있고 그 뒤 계단을 올라가면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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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경내 화단에 붉은 접시꽃이 무더위 속에서도 활짝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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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두 분이 대웅전 부처님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데,
귀 기울려 보니
불자인 어느 여자분이 함께 절을 하는 것을 보니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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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물고기
이유는
물고기가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눈을 감지 않을뿐 아니라,
죽어서도 눈을 감지 않듯
수행자도 물고기 처럼 항상 부지런히 도를 닦으라는 뜻
“눈을 떠라!
물고기 처럼 항상 눈을 뜨고 있어라!
깨어 있어라!
언제나 혼침과 번뇌에서 깨어나 일심으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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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 조사전
목조여래좌상과 지공,나옹,무학대사 영정
▽
회암사 우측 능선에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 그리고 부도비 등 중요문화재들이 모여 있었는데,
좌측 능선에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모조비가 홀로 서 있어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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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과 관음전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대규모의 무차 대회(無遮大會)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 주며 집행하는 법회]를 계획하여
불교 중흥을 꾀하였으나,
무차 대회 직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던 회암사는 유생들의 탄압과 비난의 표적이 되어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회암사가 언제 폐사(廢寺)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선조 28년[1595] 조(條)에 회암사를 ‘옛터’로 기록하고 있어서,
명종 대에 유생들에 의해 방화되었거나 임진왜란 중에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한 14세기 후반부터 문정왕후가 불사를 후원했던 16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 동안의 최대 사찰의 위상과 권위는 일단락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회암사지 중요문화재를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회암사지에서 멀리 벗어나 산속 깊이 세워졌는데, 어쩌면 유생들에 의해 혹은 다른 영향에 의해
피해 입을 줄 미리 알고 세 고승의 영력으로
그곳에 세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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