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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경기 여행

(양주) 사적 제128호- 태조 이성계가 말년에 머물렀던 회암사지(檜巖寺址)

 

사적 제128호

태조 이성계가 말년에 머물렀던 회암사지(檜巖寺址)

 

 

 

 

 

언제 : 2018년 7월 23일 월요일

어디 :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일주일에 하루 주어지는 가슴 벅찬 휴일.

 

장마가 다른 해보다 일찍 끝나자마자

무더위가 닥쳐 15일이 지나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한반도를 푹푹 삶아버리고 

 

 세계 곳곳에는 무더위와 홍수로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는 말세기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게 더운 날

 회암사지를 찾아간 이유는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 조준 등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 기본 이념으로 삼았기에

고려와는 달리 숭유억불 정책으로 국가가 주관하는 불교 행사나 제도를 폐지하였는데

 회암사는 13대 명종까지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다. 

 

그 이유는

태조 이성계가 말년에 무학대사와 함께 이곳에 머물렀고, 왕실사찰이었기 때문으로

유서 깊은 사적지의 역사적 내력, 회암사와 인연을 맺은 고승들, 가람의 구조, 유물 들을

살펴보고자 길을 나선다.

 

 

 

회암사와 관련된 삼화상

나옹 스님이 “천보산 자락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일어난다”는 스승인 지공 스님의 말에 따라 회암사를 중창했다.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주석했다.

 

 

 

회암사에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머문 이유는

한양에서 함흥으로 가는 길목에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양이 또한 멀지 않다는 것이다.

 

- 화암사지에서 본 도봉산 -

 

 

 

 

왕자의 난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방우·방과·방원(후의 태종) 등 여섯 형제를 두었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와의 사이에 방번·방석을 두었는데,

태조가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개국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방원은 아버지 처사에 불만이 있었고 개국공신 정도전·남은과의 입장 차이가 컸다.

 

정도전은 중앙집권화정책 과정에서 왕실의 힘을 약화시키고 유신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1398년 이방원은 정도전·남은 일파를 불의에 기습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 등을 살해한 후 정종(2대)을 옹립했다.


 1400년 1월에 신의왕후의 소생인 방간과 방원이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무력충돌을 벌였다.

 치열하게 싸웠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방원의 승리로 끝났고 

 이로써 방원의 지위는 확고해지고 마침내 세자로 책봉된 후 그해 11월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태종이 되었다.  

 

 

 

1446년(세종 28) 4월23일 효령대군(1395~1486)이 회암사에서 법회를 열고 있었다.

그때 양녕대군(1394~1462)이 들판에서 사냥해온 짐승으로 ‘바베큐 파티’를 열었다. 형이 신성한 절간에서

고기를 굽자 효령대군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아니 지금 불공을 들이고 있는데…. 좀 심하지 않느냐”고 힐난했다.

그러자 양녕대군이 했다는 말….

 

“나는 살아서는 국왕(세종·1397~1450, 재위 1418~1450)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佛者·효령대군)의 형이 되어 보리(菩提·깨달음의 경지)에 오를 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세종실록>)

(2022년 8월 9일 경향신문에서 발췌- 보강한 정보)

 

회암사는 선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선종(불교의 종파) 사원이다.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종과 차이점이 있다. 선종에서는 부처를 모시는 불전, 탑보다 현신의 부처인

주지의 공간인 방장과 수행 공간인 승당, 중료 등이 핵심시설이며, 수행 공동체 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건축물이 배치되어 있다.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회암사지가 이렇게 큰 이유

종교적인 영역과 생활 영역 그리고 정치적인 영역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회암사지

평지에 계단식으로 가람이 구성되어 크게 보이지 않으나 지금까지 본 불교 사찰의 건물 군은

가장 클 듯 싶다. 

 

 

 

 

당간지주와 괘불대 그리고 많은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특히 회암사지 바로 위에는

 회암사지 부도탑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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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 건물 터와 기둥 밑돌들 그리고 석축이 그대로 있다.

 

 

 

회암사의 정문이었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주춧돌의 수가 532개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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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장 윗쪽에 자리한 회암사지 부도탑이 궁금하여 당겨본다.

 

 

2000년 5월 회암사터의 6단지 보광전 네 모서리 중 두 모서리에서 출토된

명문 청동풍탁(풍경). 풍탁에서는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무학대사)’와 ‘조선국왕(朝鮮國王·이성계)’,

‘왕현비(王顯妃·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세자(世子·방석)’ 등의 명문이 보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동 풍탁(풍경)에 새겨진 명문 134자

. “천보산 회암사 보광명전의 네 모서리를 금으로 단장하여…금탁을 매달아 부처님께 바칩니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함께 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라는 내용이다.

이 보광전 불사의 공덕주(시주자)는 환관인 ‘판내시부사 이득분’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신덕왕후 강씨가 위독해지자 이득분의 집에서 치료했으며, 그곳에서 승하했다.

이득분은 강씨와 강씨의 소생인 세자 이방석의 든든한 후원자였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회암사터에서는 일반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높은 위상의 유물들이 출토된다.

청기와는 물론이고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이름을 새긴 수막새와 임금의 상징인 봉황문 수막새 등이 쏟아져 나왔다.

회암사가 또하나의 궁궐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회암사터에서 확인된 높은 위상의 유물들. 궁궐 건물에 걸맞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회암사터에서 출토된 백자 인물상과 용문양 암막새.

사찰 건물이 궁궐의 위상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사리전지

 

 

 

 

 

 

 

 

 

정청지

왕이 정사를 보던 집터 - 정면 3칸 측면 2칸(71㎡)

회암사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말년을 지내며 중요한 정사들을 챙겼던 곳이다.

 

의정부
이성계가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임금이 되자 함흥으로 가 있다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회암사에 머물렀다.

이성계는 이방원의 왕위 승계에 불만이 있어 옥새는 물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정승을 보내어 옥새를 사용케 했다고 해서

이곳을 의정부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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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본 제 5권역

 

 

비록

지금은 건물하나 남은 것 없지만, 건물터와 주춧돌 그리고 각종 석축들이 많이 남아

회암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나를 알 수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본 회암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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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는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으며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고,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세조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산산조각 난채로 발견된 불상들. 아마도 유생들이 절을 불태우면서 마구 훼손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억불의 물결 속에도

나름 건재했던 회암사는 연산군(1494~1506)의 폐불로 위축됐다가 다시 살아난다.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였던 문정왕후(1501~1565) 덕분이었다. 문정왕후에 의해 발탁된

보우(1509~1565)는 불교의 세속적 권리를 회복하려고 선·교 양종과 승과를 부활했다.

 

1552년(명종 7)의 제1회 승과에서 휴정(서산대사·1520~1604)이,

1561년(명종 16)의 7회 승과에서 사명(1544~1610)이 합격했기 때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휴정은 73살의 노구를 이끌고 승병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정은 어떤가.

역시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맺고,

잡혀간 조선인 3000여 명을 인솔·귀국하기도 했다.

 

1566년 4월 20일 <명종실록>은 심상치않는 기사 2건이 보인다.

“문정왕후 승하 이후 제주도에 유배된 보우가 제주 목사(변협·1528~1590)에게 주살 당했다”는 내용과,

“송도의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내용 등이다.

회암사가 정말로 유생들에 의해 불에 탔는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30년 후인 1595년(선조 28) 6월4일 “회암사 옛 터에 불탄 큰 종이 있다”는 <선조실록> 기사를 보면

회암사가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고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어떤가.

회암사터에서 왜 불상들이 목이 잘리고 몸통이 갈기갈기 찢긴채 흩어져 있었는지

어렴풋 그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은가.

 

- 2022년 8월 9일 경향신문에서 발췌 -

 

 

 

회암사 복원도

목은 이색의 ‘회암사수조기’는 “회암사 전각만 모두 262칸이고

15척이나 되는 불상이 7구, 10척인 관음상 1구가 조성됐다”고 기록하고 “장대하고 미려하기가 동국(고려)에서 으뜸이고,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사찰이라고 하니 과장된 말이 아니다”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양주 시립 회암사지 박물관 제공

- 2022년 8월 9일 경향신문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에서 발췌 -

 

- 2022년 8월 9일 05:30 경향신문에서 발췌 보강한 정보 -

 

 

태양이 이글거린다.

오늘이 일 년 중 가장 덥다는 대서인 줄도 모르고 회암사지가 너무 궁금하여 길을 나섰다.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조선 초까지 그 찬란한 빛을 잃지 않고 지켜왔던 곳이고

또한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당시 이곳에 와서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더운 줄 알고

집에서는 새벽같이 움직였는데, 인천에서 회암사지까지 2시간이 넘게 걸려 이미 태양열과 지열로

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줄줄 흐른다.

 

그러나

그동안 회암사란 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조선 500년 역사가 시작되는 놀라운 현장이었다는 것을 알고 쉽지 않은 걸음을 했고

몰랐던 역사를 다시 공부하고 돌아볼 수 있어 보람이 크다.

 

절터에는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 회암사지무학대사탑(보물 제388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5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