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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담양) 정철(鄭澈) 사미인곡의 산실 - 송강정(松江亭)

 

정철 사미인곡의 산실-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

 

 

 

 

언제 : 2018년 1월 2일 화요일

어디 : 전라남도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너른 담양 들을 지나 영산강 지류인 조그만 내(죽녹천)를 건너니 조그만 대나무숲 앞

길 한편에 송강정 안내판이 있다.


송강정(松江亭)

 

누정은 인간의 일상과 자연의 경계에 있는 공간이다.

그런 정자가 일대에 많았다는 것은 은거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갖췄다는 것이다.

그중에 송강정은

산수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송강 정철이 생의 말년에 가사 중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으면서

4년 동안 조용히 은거생활을 했던 곳이다.


 둘레에는 노송과 참대가 무성한 산 언덕에

 앞에는 평야, 뒤에는 증암천이 펼쳐져 있으며, 멀리 보이는 무등산의 그림자가 수려하다.

정철은 이곳에서 〈사미인곡 思美人曲〉을 지었다 하며,

현재 정자 옆에는 그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정철(鄭澈 1536 ~ 1593)

조선 중기 문인이며 정치가로,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이다.


누이 둘이 왕실에 출가한 인연으로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하면서 같은 나이의 경원대군(명종)과 친숙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와 관련하여 아버지가 유배되었다가 1551년에 풀려나자,

할아버지 고향인 전라도 담양 창평으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10년을 보내게 된다.


여기에서 임억령에게서 시를 배우고 김인후·송순·기대승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성혼·송익필(宋翼弼)과 친교를 맺었다.


1562년(명종 17)에 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관직에 올랐고,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관동별곡>과 <훈민가(訓民歌)>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의 재질을 발휘했다.


1584년(선조 17) 대사헌이 되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해에 대사헌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창평()으로 돌아와

초막 죽록정() 짓고 4년 동안 조용히 은거하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를 많이 지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계기로

다시 조정에 들어가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동인을 탄압했으며,

1591년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건의했다가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그는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동인과의 대립 속에서 여러 차례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하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집인 <송강가사>가 있다.


지금의 정자는 1770년에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그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죽록정()

 

많이 그리웠기에 숨이 턱에 차는데도 발걸음을 서둘러 올라  현판을 읽는데,

송강정이 아니라 죽록정이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그곳에 대해 사전 지식을 습득하는데, 이번 담양 여행은 항상 첫번째 여행지였음에도

정자에 대해 공부를 하지 못했음을 여행 후 절실히 깨달게 되었다. 


여행은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송강정(松江亭)



송강정 마당 지나 저만치엔 장송과 대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사미인곡(思美人曲)  비(碑)


사미인곡

" 이 몸이 생겨날 제 님을 따라 생겨나니 한 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남 하나 날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사랑 견줄 데가 다시없다"라고 시작해서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져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다니다가 향 묻힌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르셔도 내 님 좇으려 하노라"

 

요샛말로 옮겨보면

 '날 때부터 각하를 따른 동지애는 하늘도 압니다.

청년 시절 각하께서 저를 총애하셨으니 그 마음 비할 데가 있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동지로 여기겠다 하셨거늘, 제가 연로하다고 하여 저를 은퇴시키는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각하께서는 모르셔도 저는 끝까지 각하와 함께하렵니다.

참 낮 간지러운 글이네!


 


임금을 원망해도 흠모하는 정으로 마무리한다.








 

정철은

월한 비유법과 우리말 어법 파괴와 같은 파격적인 언어 구사,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작품들로 우리나라 시조와 가사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4편의 가사는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김만중은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을 두고 "우리나라 참된 글은 이 세 편뿐이다."라고

극찬하기까지 했다.


<성산별곡>

가 25세 때 처가 당숙인 김성원이 장인 김억령을 위해 지은 서하당의 절기별 아름다움과 풍류를

노래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다.

 

<관동별곡>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내금강, 외금강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절경을 보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관찰자로서의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사미인곡>

정철이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한 것이며,

<속미인곡> 과 함께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송강정은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좌.우. 전면은 마루를 두었다.



 

 

앞에 <松江亭遺墟修理詩序>를 쓴 6세손 정재(鄭栽)가 송강과 우계의 교유와 그들이 쓴 시들을 보고 감흥하여 쓴 시.

오언절구 4수, 칠언 절구 1수가 판각되어 있다.

遺墟修理時敬次松牛兩先生韻感而有述

廢棄何年事 空山失主賓 繼今修舊址 誰復作亭人

이 정자 몇 해나 버려져 있었나
주인과 길손 잃은 빈 산 같은데
이제 와서 옛 터를 수리 하노니
그 누가 다시 이 정자에 노닐까

江湖昔臥病 歌醉伴閒鷗 遺躅重尋處 悄然獨立洲

그 옛날엔 병처럼 강호를 좋아하면서
노래와 술로 한가한 갈매기 벗했으니
남겨진 자취 다시 찾아 온 이 곳인데
강가에 홀로 서서 서럽기만 하오이다

竹綠又亭名 不知而老去 近聞馬里傳 更質鳳嵒語

죽록은 송강정 다른 이름인데
그걸 모르고 나이만 들었구나
요사이 마리의 전함을 들었고
다시 봉암의 말도 따져보았지

荒址巋然在 江流空自淸 種松兼屛穢 從此我心醒

높다란 곳에 황량한 터 있는데
흐르는 강물 뭐 저렇게 맑은지
소나무 심은 차에 잡초도 없애
이제야 내 마음 후련도 하네야

竹綠松江卽一亭 先生於此謝簪纓 可憐遺址今荒廢 早晩重修聽輿評
六世孫 栽謹稿
죽록과 송강은 하나의 정자인데
선생께서 소일하신 곳이 여기라
유지가 황폐한 지금 께름한 터라
곧 중수하여 많은 품평 들으리라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쓴 칠언 율시 1수.

『송강집(松江集)』1권에는 2수가 실려 있고, 판각되어 있는 시는 두 번째 시이다.

新院山居 寄示習齋 權公名擘

每憶松江舊業荒 鍛鑪中散離山陽 消殘物外煙霞想 辦得人間卯酉忙
一歲九遷都夢寐 修門重入幾星霜 舂糧更適南州遠 宣政無由覲耿光

신원 산에 있으면서 습재에게 부치다 권공의 이름은 벽이다

늘 창평의 옛 집이 황폐해감을 생각하면
대장장이 혜강이 산양을 떠났을 때 같아
속세를 떠나 은거하려는 생각은 사라지고
여느 관원들처럼 출퇴근하느라 바빴었지
꿈결처럼 한 해에 아홉 번이나 옮겼었고
대궐에 다시 들어가선 몇 해를 보냈던가
다시 남쪽 멀리 가려 양식을 찧어놓으니
조정에서 성상을 뵈올 길이 없구만 그려

 

 

 

후손 정해길(鄭海吉)과 정득원(鄭得源)이 쓴 오언절구 각각 2수.

我到宋江舍 不須問主賓 今來花樹會 知是一家人

송강 정자에 온 우리더러
주인과 길손을 따질 필요 있나
이제 화수회에 와서 보니
모두 한 집안 사람이니 말이네

吾祖建亭意 歸來伴白鷗 君恩終不許 辜負芰荷洲
癸巳 梧翰十世孫 海吉

우리 선조 정자 세우신 뜻
돌아와 갈매기랑 벗함인데
성은이 끝내 불허하였으니
은거하는 것을 저버렸다네

高亭出竹綠 有主豈無賓 湖魚相忘處 應識此來人

높다란 정자 죽록에 세워지니
주인 있는데 손님이 없을소냐
물고기마저 피아를 잊는 데라
여기 오는 사람을 알만하구나

至今三百載 往蹟問江鷗 江鷗如解意 盡日在空洲

男得源承命幷書

삼백 년이나 흐른 오늘이라
지난 자취 물새에게 물을 밖에
저 게 내 속을 알기라도 한 듯
빈 백사장에 종일 서있네

 

 

 

우계 성혼(牛溪 成渾)이 송강의 시에 화답한 시문.

『우계집(牛溪集)』1권에 <次鄭松江韻>라고 되어 있으며, 뒤에 정철에게 보내는 편지가 함께 실려 있다.

上松江韻次
彼美松江水 秋來徹底淸 湯盤供日沐 方寸有餘醒
牛溪 右畸菴手筆集字

저 아름다운 송강의 물이
가을 들어 더욱더 맑으니
탕반에 부어 매일 씻으면
마음 또한 깨우침 있겠지

 

 


송강 정철이 쓴 칠언 율시 1수. 이 시 또한 『송강집(松江集)』1권에 실려있다.

西湖病中憶栗谷 ‘’
經旬一疾臥江干 天宇淸霜萬木殘 秋月逈添江水白 暮雲高幷玉峯寒
自然感舊頻揮涕 爲是懷人獨倚欄 霞鶩未應今古異 此來嬴得客心酸
松江 右季子弘溟手筆集子

서호에서 병중에 율곡을 생각하며

십 일 남짓 걸린 병에 강 언덕에 누우니
내리는 무서리에 온 나무는 시들해 버려
밝은 달에 먼 강물은 그 빛 더욱 하얗고
저문 구름 봉우리 둘러싸고 차갑게 보여
그래서인가 옛 생각에 눈물 자주 훔치고
이렇듯 임 그리워 홀로 난간 기대었는데
석양 무렵 따오기 예나 지금이 다를까만
여기 나그네 신세 더더욱 처량만 하구려




미세먼지로 뿌옇게 보이지만 송강정 앞 마당에서 바라본 너른 들 너머 멀리 무등산이 조망되고

그리고

옆에는 죽록천이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18세기 후반~19세기 초 시조집 '근화악부(槿花樂府)'에 귀양살이 중인 노인과 기생이 주고받는 시조가 나온다.

내용이 민망하다. 


'玉이 옥이라커늘/반옥(玉)만 너겨떠니/이제야 보아하니/진옥(眞玉)일시 젹실(的實)하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뚜러 볼가 하노라'

여자가 화답한다.

'철(鐵)이 철(鐵)이라커늘/섭철(鐵·잡철)만 녀겨떠니/이제야 보아하니/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뇌겨 볼가 하노라'

'살송곳'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시인은 송강 정철이다.

 '골풀무'로 역공을 하는 시인은 그 송강이 귀양 시절 만난 기생 진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