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신앙의 모태 중화동 장로교회
어디 :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연화리 335
백령면 중화길 230-13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중화동 교회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개신교회인 1883년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소래교회와 서울의 새문안교회(1885년) 다음으로
1896년에 세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이다.
중화동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중국과 외국 배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이라 하여 중화동이 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1816년 기독교 최초의 한문성경이 영국해군 함선 Alcester호와 Lyra호에 의해서 백령도에 전해졌고
1832년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키슬라프 목사와 1865년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 선교사가
두문진을 통해 상륙했다고 한다.
또한 1846년 김대건 신부가
마지막으로 백령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 순교를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 시절 교회 건물이 원형대로 보존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원형의 형태는 어디도 찾아볼 수 없는 검붉은 벽돌로 세운 교회를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교회라고 말하기는
솔직히 낯 뜨거운 일이다.
최초의 기독교 복음 전래지 - 중화동 교회 이야기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19세기의 바깥으로 밀려든 선교의 물결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 물결이 가장 먼저 닿은 곳이 서해의 백령도가 속해 있는 대청군도이다.
1898년 백령도 지니의 첨사 자문역으로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이 복음의 씨앗을 받고 그 곳에 유배 되어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과 함께 한학 서당에 중화동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
중화동 교회는
중화동포구를 지나 중화동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조그만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다.
▽
교회 오르는 언덕 우측에 서 있는 두 그루 나무의 수령은 족히 150년은 넘은 듯하다.
중화동 교회
교회 내부
중화동 교회와 역사관
당연히 역사관을 들러 초창기 교회 전파 과정도 봤어야 옳은데
중화동 교회의 본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벽돌로 지은 교회가 있어 역사관 자료라고 별수 있겠나 하고
그냥 나온 것이 후회스럽다.
내부에는 초기 중화동교회 모습,
최초 백령도 복음 전파 장면, 서양선교사 성경 전달 재현, 토마스 선교사 방문 모습, 언더우드 선교사 세례 집례 등을 전시하여
백령도가 ‘선교현장’ 역할을 하였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슨 종일까?
물론 중화동 교회에 달았던 종이라면 종탑이 있던데 왜 달아놓지 않았을까?
안내문이 있으면 좋았을 걸.
지금은 보기 드문 교회 종탑이 세워져 있다.
교회에서 내려다 본 마을과 저 산너머에는 중화동 포구가 있다.
아마도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배를 타고 왔으니 저 포구에 닿아 복음을 전파했을 것인데, 포구도 사진에 담지 못함은
단체관광이다 보니 그렇다.
옹진 백령도 연화리 무궁화 - 천연기념물 제521호
백령도 중화동교회 앞에 있는 연화리 무궁화는 높이가 6.3m로 국내에게 제일 크다고 알려져 있으며 모습도 빼어나다.
꽃잎과 꽃술 부분이 붉은 재래종으로 섬바람을 이겨내고 오랫동안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무궁화 수명은 보통 40~50년이므로 수령이 100년 안팎인 연화리 무궁화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며,
생활문화사적 가치도 아주 크다.
백령도
서울과의 직선거리는 시청 기준 201km지만, 북한 평양과의 거리는 149km이며 장산곶에서는 14km도 채 되지 않는다.
또 중국 산동 반도 최동단, 즉 중국본토와의 최단거리는 180km 정도 된다.
서울보다 평양의 거리가 훨씬 가까운 백령도이지만,
백령도의 가을은 우리의 가을과 차이가 없어 추수가 끝나 흔적만 남은 들과 산에는 아직 단풍이 지지 않고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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