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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제주 여행

(제주 모슬포) 제주 4 .3 항쟁 섯알오름과 알드르비행장

 

제주 4 .3 항쟁 섯알오름과 알드르비행장

 

 

 

 

어디 :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일대

 


 제주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섬이지만, 또한 곳곳에 슬픈 역사가 깃든 섬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갈치조림으로 모슬포에서 이름난 식당은 만원인데,

 식사가 끝나고 아직 치우지 못한 자리가 있어 한참을 기다려 맛나게 점심을 든 후

모슬포 교회를 방문하고,

 제주 4.3 항쟁 유적지인 섯알오름에 도착 차에서 내리자마자

높은 습도와 뙤약볕으로 벌써 땀을 흘린다.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 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모슬포 교회


제주 4.3 사건 때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내어놓고 학살의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던 이가

당시 모슬포교회를 담임했던 조남수 목사였다

특히

150여회의 자수강연을 통해 3000여 명의 사람들이 자수를 했고, 

죽음에 직면하게 된 소위 산사람측으로 여김을 당한 200여 명을 조목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보증한다며

데리고 나와 이들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단다.






제주 4·3 사건의 발단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저지하고 통일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처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공포가 합해져 양 측의 대립은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이 제주 4·3 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조사결과 사망자만 14,032명(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외)에 달한다.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이덕구는 6월에 경찰관 발포로 사살되고,

김달삼은 그해 6월말 9월의 해주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차 제주도를 빠져나가지만

학살은 1953년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녹쓸은 4.3유적지 섯알오름 안내판

 

 

 

 

알뜨르비행장 남동쪽에는 섯알오름이 있다.

 제주 4.3사건의 현장으로

이전에 일제의 탄약고였던 자리로 일제가 물러나면서 전쟁무기를 바다에 수장시키고

시설을 폭파했는데 대형 탄약고가 폭파되며 오름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생겼다.

이후 4.3사건이 진행되며 군경토벌군이 이 웅덩이에 예비검속자 252명을 몰아넣고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섯알오름은 셋알오름으로 이어지는데 이곳도 경악할 만한 곳이다.

길이가 1220m나 되는 일제의 진지동굴이 있는데 입구가 여러개고 각 통로가 바둑판처럼 복잡하게 얽혀

 마치 미로와 같고, 폭 4m, 높이 5m나 되는 입구도 있다.

트럭이나 차량이 출입하도록 만든 통로다.



제주 4.3 유적지 섯알오름

 

이곳은 제주 4.3사건이 진정될 국면으로 접어들 무렵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내무부 치안국에서는

1945년 미군정에 의해 폐지된 예비검속 법을 악용하여 각 경찰국에 불순분자 등을 구속하고

처리하도록 지시하였고,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는 344명을 예비검속하고 그중 252명이 당시 계엄군에 의하여

집단학살 되고 암매장되어 211위는 유가족들에 수습하였고, 41위는 행방불명된 비극적 현장이다.


당시 대정, 한림, 한경 등을 관할하던 모슬포경찰서에서는

농민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우익단체장, 학생 등 344명을 예비검속하고 한림어업창고와 무릉지서,

모슬포 절간 고구마 창고에 구금하여 1950년 7월 16일 1차로 20여 명을 학살하고,

2차로 8월 20일 새벽 2시에

 한림어업창고 및 무릉지서에 구금된 130여 명을 집단학살하는 등

 3차례에 걸쳐 법적인 절차도 없이 무고한 양민 211명이 이곳에서 억울하게 집단학살을 당한 곳이다.

 

이후 1956년 3월 29일 새벽에 한림지역 유가족들은 한림어업조합창고와 무릉지서에 구금되었다가

희생을 당한 62위를 수습하여 한림읍 금택리 지점 묘역에 안장하였고,

동년 5월 18일에는 모슬포 절간고구마창고에 구금되어 희생을 당한 백조일손 유가족들의 끈질긴 탄원으로

당국의 허가를 받고 149위를 수습하여 이중 17위는 유족에 의해 개인별 인도하였지만 구별할 수 없는 유해

132위는 대정읍 상모리 지점 백조일손묘역에 안장하였다.

 

또한 백조일손 유가족들은 행방불명된 41위를 찾기 위해 제주도의 지원을 받아 2000년 9월 21일까지

 증언자의 의견을 토대로 주변 여러곳을 수색하며 유해발굴을 시도하였으나

많은 세월이 경과하고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여 추가 유해발굴은 실패하였다.

 

 

 


 


 

섯알오름 희생자 추모비


제주4·3사건 진상규명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전문 14개조와 부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0년 1월 12일 제정된 이후 일부 개정되었다.


이 법에서 사용하는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정부는 제주4·3사건 희생자를 위령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며

위령제례 등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위령묘역 조성, 위령탑 건립 등 필요한 비용을

예산의 범위 내에서 지원할 수 있다(제8조).

 


앞에 길게 누운 섬 가파도 - 뒤로 좌측 약간 솟은 마라도

 

 

 

섯알오름에서 본 모슬포시내

 

 

 

섯알오름 일제고사포진지

이 시설물은 당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알뜨르 비행장을 보고하기 위한 군사 시설이다.

1943년 무렵에

 원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구축된 고사포 진지로, 5기의 고사포 진지 중 4기는 완공되고, 나머지 1기는 미완공된 상태이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군사 시설의 하나로

태평양 전쟁 말기, 수세에 밀린 일본에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로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이 시설물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들이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건설한 전투기 격납고이다.



   

 


 

 

이 시설물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들이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건설한 전투기 격납고이다.

 

 


남제주 비행기 격납고

등록문화재 33호 - 1937년 건립


이 시설물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들이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건설한 전투기 격납고이다.

당시 20기가 건설되었지만, 지금은 19기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1기는 잔재만 남았다. 이 유적은 제주도를

일본군의 출격기지로 건서라려 했음을 보여주는 지상 건축물로, 진지를 구축하려했던 인공 동굴은 많이 있으나,

다량의 지상 시설물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이것이 유일하다.




알뜨르의 제로센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가 중국대륙의 남경 폭격을 위해 1926년부터 10년 동안 건설한데서 비롯된다.

비행장의 격납고들은 패전의 기운이 역력해지던 1944년, 미군의 일본본토 진공루트 7개를 예상하고 만들어진

일제의 본토방어계획 중 '결7호' 작전의 가미가제 전투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곳 알뜨르에는 일제의 전투기를 감추기 위해 시설된 당시의 격납고 총 38개소 중 20개소가 현재까지 콘크리트 구조물로

온전하게 남아있다

이 작품은 일제의 태평앙전쟁기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전투기인 제로센을 실물크기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획 박경훈 개인전 알뜨르에서 아시아를 보다)의 출품작 중 하나다.

전시 당시의 작품제목은 (애국기매국기)였다.


작가 : 박경훈, 강문석

재료 : 철

크기 : 길이x높이x폭 / 날개넓이 : 9mx3mx11m/21㎡

 

 

 

 

모슬포 시내와 모슬봉

 

 

알뜨르비행장은 일본이 ‘대동아공영’이라는 헛된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건설한 비행장이다.

1937년 일제는 서양 세력으로부터 동북아를 지키겠다는 알량한 핑계로 대대적인 침략전쟁을 개시한다.

바로 중일전쟁이다.  

하지만 일제가 제주 대정읍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한 건 1920년대 중반의 일이다.

당시 기술로는 폭격기가 일본에서 중국까지 한번에 비행할 수 없었기에

중간 지점인 제주도에 내려 연료를 공급받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일제는 비행장 건설을 위해 살고 있던 사람들을 내쫓았다.

알오름동, 저근개, 골못, 광대원 등 일대의 마을이 사라졌다. 삶터를 빼앗겨 억울한 주민들은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10여년의 공사 끝에 20만평 규모의 비행장이 만들어졌고 실제로 중일전쟁에서 중간보급기지로 활용됐다.

1940년대로 들어서며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본은 미국의 공습에 대비해 ‘결 ◌호 작전’이라 명명한 본토사수작전을 계획한다.

 ‘결 1~6호’는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계획이고 ‘결 7호’는 이곳 제주 공습을 대비한 계획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일본은 알뜨르비행장을 대대적으로 확장한다.

 다시 조선인을 동원해 비행장을 80만평 규모로 늘리고 방호벽과 동굴진지를 구축하는 등 ‘전 섬 요새화’에 돌입했다.

1944년 300여명에 불과하던 제주 주둔 일본군이 1945년 8월에는 7만5000명까지 늘었으니

이곳에 감돌았을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활주로는 길이 1400m, 너비 70m로 1980년대까지 비행기 활주로로 사용됐다.

처음 완공했을 때는 잔디를 깔고 그 위에 미끄러짐 방지를 위해 구멍 뚫린 PS철판을 깔았다고 한다.

이 잔디마저 양민에게 할당량을 주고 쥐어짜낸 것이었다.  

일제는 비행기 격납고를 만들어 폭격기를 감춰두고자 했다.

폭 18.7m, 높이 3.6m, 길이 11m로 똑같은 크기의 비행기 격납고가 아직도 원형 그대로 19개나 남아 있다.

철근 콘크리트로 짓고 지붕에는 흙을 덮어 위장했는데 그 위로 풀이 자라 들판에 있는 작은 동굴처럼 보인다.

이곳에 ‘빨간잠자리’라 불린 ‘아카톰보’ 폭격기를 감춰두려 했는데 정작 전쟁 말기에 폭격기가 모자라

원래 목적대로 쓰이지는 못했다고 한다.  

격납고 중 한곳에는 제로센 모형이 들어있다.

2010년 열린 ‘경술국치 100년 박경훈 개인전’의 설치작품이다.

작품명은 ‘애국기 매국기’로 격납고와 어우러져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산방산과 격납고

 

  

 


알뜨르비행장에는 의심스러운 작은 구릉들이 많다.

흙과 풀이 자란 19개의 비행기 격납고 외에 4개의 환기구가 있는 지하벙커도 있다.

벙커 역시 수풀로 덮여 주변의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런데 입구를 찾아 들어가면 보고도 믿기지 않는 콘크리트 시설물이 나타난다.

마치 어제 완성한 듯 벽면이 깨끗하고 공사도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이 역시 일제가 조선인을 동원해 다급하게 구축한 시설로 패망해 물러가면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새집으로 남았다.

폭 28m, 길이 35m의 크기가 다른 두 공간이 방처럼 맞붙어 있고 벽면 아랫쪽으로는 홀이 파여 있다.

중간쯤에 벽장처럼 파 놓은 곳이 있고 천장에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뚫어놓은 통로가 있다.

환기구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활주로와 관련된 통신시설이라는 추측도 있다.


 

 

아직도 원형 그대로 남은 격납고 

  

 

 

 

 

 

학생들이 견학을 왔다.

 

 

 

섯알오름과 격납고

 

 

 

 

4.3 유적지인 섯알오름과 알드르비행장 일제전적지를 둘러보느라 이곳 저곳 다녔더니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일기예보에 제주에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데,

비가 내리면 불편하기는 하지만 비가 내려 이 더위를 식히면 좋겠다.

이제 바로 옆 송악산으로 이동하여 해안 동굴진지를 살펴본다.

 

 

 

멀리 산방산이 조망된다.

 

 

송악산해안 일제동굴진지

등록문화재 제313호

 

이 시설물은

일제강점기 말 패전에 직면한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연합군 함대를 향해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구축한 군사 시설이다. 그 형태는 ㅡ 자형, H 자형, ㄷ자형 등으로 되었으며

제주도의 남동쪽에 있는 송악산 해안 절벽을 따라 17기가 만들어졌다.

 

제주도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해안 절벽을 뚫어 만든 이 시설물은 일제 침략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함과 더불어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이 강요되는 전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가가서 살펴보려 했는데 출입금지 지역이다.

 

 

형제의 섬과 스쿠버다이버들


4.3 제주 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아픔이다.

더 자세하게 피력하고 싶었으나 여러 제약으로 4.3 사건 혹은 제주 항쟁을 마무리 하려니 송구스럽다.


현대사의 아픈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의 가치와 소중함을 배우고자  4.3 항쟁을 다뤘으나 아쉽다.

진보나 보수나 한 민족이고 4.3 제주 항쟁 역시 우리 민족의 아픔이다.


송악산 휴게소에서 얼음물로 더위를 식히고

도립공원 곶자왈과 산방산 아래 용머리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