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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제주 여행

(제주 애월) 사적 제396호 - 항파두리 항몽유적지(缸波頭里 抗蒙遺蹟址)

 

사적 제396호

 제주 항파두리 항몽유적지(濟州 缸波頭里 抗蒙遺蹟址)

 

 

 

 

언제 : 2017년 8월 14일 월요일

어디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제주도 여행은  번째로

번의 여행은 아내와 다녀온 여행이었고, 2005년 블로그를 시작하며 다녀온 여행은

2007년 6월 한라산 등반이었으니 10년 만의 제주도 여행길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첫째 - 강화도 여행과 지난 6월 16일 진도 여행에서 삼별초가 여몽군에서 패하여 제주로 이동하는 것으로

마감하여 제주도 항몽에 대해 삼별초 유적지를 보는 것이다.

 

둘째 - 모슬포 제주 양민 학살 현장을 살펴보는 것이며,

 

셋째 - 예전엔 다녀보지 못한 곳을 몇 군데 찾아보는 것이다.

 

일기예보에는 제주도에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지만 날씨는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

상황에 따라 돌아볼 예정으로 담담히 떠난다.

 

 

 

김포공항에서 내가 타고 갈 KAL




시화호 상공


  


남부지방으로 갈수록 난기류였으나 큰 흔들림 없었다.



 

  제주에 비가 온다는 뉴스를 보았는데 제주 공항에 착륙하니 흐리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



 

09:20

제주공항을 나와 승용차 렌트하여

11:00

첫번째 방문지인 애월읍 항파두리 항몽유적지에 도착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토성

- 모셔온 사진 -


항파두리 항몽 유적 토성

애월읍 고성리에 있는 고려의 성곽. 사적 제396호. 

진도의 싸움에서 패한 삼별초는 1271년(원종 12) 5월, 장군 김통정의 영도 아래 제주도에 들어와

 이곳에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았다.          



 

 

진도에서 대몽항쟁을 전개하던 삼별초 군대가 제주에 들어온 것은 1270년(원종 11) 11월 3일
이문경(李文京) 부대의 제주 명월포(明月浦) 상륙이었다.


이문경 부대는 이미 제주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던 관군(官軍)과 송담천(松淡川)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제주도 내의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1271년(원종 12) 5월 김통정은 진도의 용장성이 무너지자, 남은 삼별초 군대를 거느리고 제주도로 들어와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대몽항쟁을 위한 본격적인 방어 시설을 구축해 나갔다.


이 항몽유적지는 1273년(원종 14) 4월 고려의 김방경(金方慶)과 원장(元將) 흔도(忻都)가 이끄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의해 삼별초가 토벌되기까지 대몽항쟁의 거점이었다.

 

 

 

돌쩌귀

이 돌들은 그 옛날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항파두성을 쌓고 동. 서. 남. 북의 4대문을 내면서

그 돌쩌귀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성문규모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이 돌들이 과연 그 때의 돌쩌귀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건축물에 이용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므로 항파두성에 따르는 유적물의 하나로 보존하게 되었는데,

 최근 항파두성의 유적지를 정화하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10개를 모아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항몽유적지 안내도 

 

 


순의문

초등학생을 데리고 온 부모도 보이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고 있었다.


 


항몽순의비

진도의 싸움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는 1271년(원종 12) 5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영도 아래 제주도에 들어와 이 곳에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았다.

내성은 사각형의 석성을 쌓았으며,

외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타원형의 토성을 쌓았는데, 그 길이가 15리에 이르러 성안의 면적은 약 30만평이나 되었다.

성에는 4대문을 설치하고 성 안에는 대궐을 비롯하여 관아·병사·군기고·후망소(堠望所)·옥사·훈련장 등을 시설하였으며,

우물과 저수지도 마련하였다.


김통정은 이 항파두성 외에도 명월(明月)과 애월(涯月)에는 목성(木城)을 축조하고,

조공포(朝貢浦 : 제주시 외도 포구)·귀일포·애월포·명월포·조선포 등에는 군항시설을 갖추었으며,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 300리에는 이른바 환해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항몽순의비 주변의 돌담은 내성이라고 한다.

 

 △

항몽유적 전시관과 유물

 ▽

 


항몽유물안내문

본 유물은 고려 삼별초군이 1271년 제주도에 입도하여 1273년 항쟁이 끝날 때까지 사용되었던  유물로

 항파두성 주위에서 발견 순의문 앞에 전시된 돌쩌귀와 더불어 이곳에 전시하게 되었다.


삼별초군이 강화도, 진도를 거쳐 제주도 입성까지

의, 식, 주에 관계된 많은 물건이 운반, 사용되었으리라 추정되는데 700여년이 지난 지금,

 당시에 사용되었던 무기류, 의류, 문서 등은 소실되어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기와류, 돌쩌귀, 자기파편 등 석기, 자기류가 남아있는 것으로 미루어 건물의 크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하겠다.


또한 이 작고 미미한 유뮬에

민족불굴의 대의를 지켜 궐기한 삼별초군의 혼이 배여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민족 자존과 호국정신의 숭고하고 강인한 우리 조상의 정신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의 유뮬인 것이다.



 

 

 

 

 

 

 

 

 




△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몽고에 저항하여 목숨을 바친 삼별초군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방문했는데, 

전시된 자료들은 사진 두 장에서 보듯 보존이 엉망이다.

이곳을 발굴한 취지는 민족불굴의 대의를 지켜 궐기한 삼별초군의 혼이 배우는 역사교육의 현장이며

민족 자존과 호국정신의 숭고하고 강인한 우리 조상의 정신을 보존하기 위함일 터인데, 

관리가 너무 엉망이다.

 

 

 


 

내성 발굴지




내성 발굴지

 

 


참고로

아래 사진은 강화도 외포리에 세워진 삼별초 항쟁비이다.


  

  

  

 


항파두성 축성

제주도를 항쟁의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군은 적의 상륙 예상지인 함덕포와 명월포의 지세를 고려하여

그 중간 지역인 항파두리에 둘레 15리에 달하는 토성을 쌓고

성내에 건물을 짓고 삼별초의 근거지로 삼았다. 


여.몽연합군의 함덕포 상륙

고려 원종 14년(1273) 4월 28일 몽골의 혼도가 이끄는 여.몽군과 이를 저지하는 삼별초군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여.몽군이 병력이나 병기에 있어 월등히 우세하여 삼별초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삼별초의 최후 혈전

삼별초군은 여.몽연합군을 맞아 함덕과 파군봉 및 항파두성에서 격렬한 방어전을 폈으나

병력의 열세로 부장급 70여명은 항파두성을 탈출, 붉은오름에 올라 최후의 혈전을 벌여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홀로 남은 김통정 장군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자결하고 말았다.

 




제주에 비가 많이 내릴 것이란 일기예보로 걱정도 있었지만,

 삼별초의 최후 항몽지를 본다는 자부심으로 항파두리에 도착하니 여.몽연합군에 의해 처절하게 무너지던

삼별초의 모습처럼 초록 잔디 위에 분홍 목백일홍 꽃이 떨어져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1270년 6월 3일

삼별초군은 강화도 외포리를 출발, 8월 19일 진도 벽파에 도착 용장성에 근거지를 정하여 항몽 투쟁을 하다가

1271년 5월 여.몽 연합군에 패퇴하여

1271년 5월 제주로 이동하여 항파두리에 근거지를 정해 최후 항몽 투쟁을 하다가

1273년 2월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학교 역사 시간에 스친 삼별초에 대해 매력을 느껴,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리고 최후 항몽지인 제주도로 이동하며

삼별초 흔적을 더듬어 보았다.

역사자료도 부족하고 삼별초를 반란으로 규정한 사학자들도 많아 아직 이것이다라고 말하긴 어려우나

나름 몰랐던 항몽 투쟁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고, 더욱 공부하여 삼별초에 대해

옳은 판단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