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전 16일 동안 머물렀던 벽파진(碧波津)
어디 :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여행을 하다 보면 스스로 지형을 살필 수 있는 눈이 생긴다.
벽파진은 아주 조그만 포구다.
조선시대인 옛날로 돌아가 살펴보면
남해에서 서해로 가려면 파도 높은 바닷길을 노를 저어 멀리 진도를 돌아 위험하게서해로 나가거나,
울돌목을 지나 곧장 서해로 들어서는 빠른 방법이 있는데
빠른 뱃길의 길목이 벽파진이다.
해 질 녘
고즈넉한 포구 어둠 드리우면
인적 없는 벽파정 올라 그날 수 백 척 왜선이 바다를 채울 때 그 광경을 바라보시던 이순신 장군의 감정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벽파진에서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울돌목)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하자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 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벽파정
이곳에서 왜선을 바라보셨을까?
2016년 7월 새로 건립한 정자로 벽파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암반 위의 정자이다.
△
벽파진 앞바다
벽파진은
남해와 서해를 오고 가는 길목인 울돌목의 거센 물결과 좁은 수로가 시작되기 전 남해의 넓은 바다로
왜선 133척이 충분히 머물수 있었던 곳이다.
△
충무공 벽파전 전첩비에서 내려다 본 벽파진 풍경
이곳에서 왜선을 바라보셨을까?
이 충무공 벽파전 전첩비
이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는
아주 넓은 암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너른 벽파진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다.
13척으로 130척이 넘는 왜군과 대치하던 장군의 위용은 찾을 길 없었으나
그 기상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앞 측면에서 본 전첩비
큰 거북상 머리 부분이 파손되었으나 발은 제대로 보존되었다.
후면에서 본 전첩비
거북의 꼬리가 제법 크게 만들어졌다.
정면에서 본 벽파정
측면에서 본 벽파정
벽파정에 걸린 현판들
진도는 국방상 중요지역의 하나로,
벽파진은진도(珍島) 동부 해안가에 위치하여 육지에서진도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일본과 중국을경계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는 수군영(水軍營)이 배치되어 있었던 곳이며,
왜함이 서해로 진출하려고 하자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명량해전을 치르기 직전 이곳 벽파진에서 16일 간 머물며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고민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을 때,
모함을 받아 옥살이를 한 후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나라를 구한 것은 민족의 최고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그러나
임진.정유의 전쟁 때 이순신을 도운 남해안 일대의 민초들의 수고와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민초들의 죽음도 기억해야 한다.
'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남 진도) 사적 제127호 - 남도진성(南桃鎭城)과 배중손 사당(祠堂) (0) | 2017.07.21 |
---|---|
(전남 진도) 사적 제126호 진도 용장성(龍藏城)과 삼별초(三別抄) (0) | 2017.07.19 |
(전남 진도) 영광 백수 해안도로와 진도 타워에서 본 울돌목 (0) | 2017.07.15 |
(전남 해남) 이순신 장군 명량대첩 현장 "울돌목" (0) | 2017.07.13 |
(전남 영광)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 법성포(法聖浦) (0) | 2017.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