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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전남 진도) 사적 제126호 진도 용장성(龍藏城)과 삼별초(三別抄)

 

사적 제 126호

삼별초(三別抄)와 진도 용장성(龍藏城)

 

 

 

언제 : 2017년 6월 16일 금요일

어디 :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 106

 

 

고려 역사는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역사 그리고 조선 역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하고 소극적인 배움이었다.


그 이유는

 조선을 개국하면서 고려의 흔적을 많이 없애 버렸을 것이고,

한국전쟁 격전지였기에 많이 파손되었고 국토 분단으로 북한 땅에 남은 고려 흔적들을 더 발굴하지 못하였으며,

군부독재 시절

민감한 이데올로기로 역사 발굴이 자칫 사상 문제가 될 시대 상황도 한몫했을 것이다.

 

강화도 여행하며, 

항몽기간 39년 고려의 수도였기에 고려 흔적이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가면서 강화도 성과 궁궐 등은 모두 불태워 버려 몇 개의 무덤과 외포리 삼별초 흔적을 보았는데,

 

마침

진도 여행 기회가 생겨 삼별초가 강화도 외포리를 출발하여 전남 진도 벽파에 도착

처음 머물렀던 용장성을 찾아간다.

 

 

 

삼별초 지도

 

용장성 표지석


 

 

 

 

 

용장성 지도

 

 

 

용장산성

 

 

용장성 안에 세워진 고려 항몽 충혼탑


 

 

 

별초(別抄)는 몽초 침입 이전부터 등장하는데,

기존의 정규 군사조직 이외의 새로이 편성된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별초는 지역별 별초, 신분별 별초 등으로 변화 되는데, 고려 전기의 군사 조직을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 조직의 등장을 의미한다.

 

첫 등장은 무신정권 초반기에 발생한 조위총이 일으킨 반란 때부터이다.

대몽항쟁과 관련하여서는 야별초 등이 주로 언급되지만, 지역이나 신분별 별초군 또한 대몽항쟁기에 활동한 모습이 확인된다.

 

삼별초는 처음에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유래한다.

야별초는 1219년 최우가 권력 보호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뒤에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방의 직할 부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에 따라 야별초는 다시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었으며,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을 포함하여 삼별초라 불렀다.

 

삼별초는 주로 경찰·군사 등의 공적(公的) 임무를 띠었으나

무인 정권기의 특성상, 실질적으로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한편으로 그 지휘관에는

 도령(都領)·지휘(指揮)·교위(校尉) 등의 무반관료들이 임명되어,

어디까지나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군조직이기도 하였다.

- 위키백과 참조 -

 

 

 

 

고려는 드디어 1259년 3월 태자의 직접 조공을 조건으로 한 휴전에 합의하였다.

 

1259년 4월 약속대로 태자 전을 몽고로 출발하였고,

6월, 고려에서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몽고와의 전쟁으로 보낸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7월에는 몽고 황제 헌종도 병사하였다.

고려와 몽고의 새로운 계승자인 전과 쿠빌라이가 만났고, 양국 간의 전쟁은 이로써 종식되었다.


몽고로부터 돌아온 세자 전은 1260년 3월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원종이다.

 

1270년(원종 11) 고려 원종은 몽골에서 돌아온 후 강화도의 모든 문무관리들에게 출륙환도를 엄명하였고,

삼별초를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명하였다.

삼별초는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자 원종은 강제로 해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삼별초는 영녕공 왕준의 형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여 원종과 대립하는 강력한 저항에 돌입하였다.

강화도에 있던 배중손은 본토와의 수로를 차단하고 고관의 가족을 포함한 강화도 주민과 병사들의 이탈을 엄중히 차단하였다.

 

또한

섬안에 있던 몽골인을 차수하는 등 단호한 대몽항전을 보여주었고 보관 된 국고와 병기를 접수하였으나

 원종이 몽고군을 끌어들여 직접 공격이라도 하면 살아남을 길이 없게 되자

독자적인 정부 수립 3일만에 본거지를 진도로 옯기게 되었다.

 

 

 

 

6월 3일

삼별초(三別抄)는 1,000여 척의 선단에 가족과 공·사노비 재물을 싣고 강화도 외포리를 출발,

8월 19일 진도 벽파에 도착해 성을 쌓고 본격적인 저항 활동을 시작하여 남해안의 주요 지역과 제주도를 석권하면서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강조하였다.

 

당시 삼별초진도를 항전의 기지로 선택한 것은

대체로 몽고병이 꺼리는 해전을 할 수 있는 섬이면서도 진도가 남쪽 해안의 여러 섬들 중에서 크고 물산이 풍부하여

군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는 점,

명량해협을 끼고 있어 전략상 요충이자 여러 조건이 응전에 유리하였다는 점,

무신정권의 기반이 있었던 곳이라는 점 등이 손꼽혀지는데, 이는 진도 역사의 지리적 특성과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최씨 정권의 경제적 기반이 진도에 있었음을 일러주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영조 때의 진도 사람 김몽규(金夢奎)가 지은 『옥주지(沃州誌)』(1761)에 보이는 최충헌의 손자이자 최우의 아들이었던

최항이 진도 용장사에 머물면서 전횡을 하였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용장사는 고려실록의 사고가 옮겨질 계획도 세워졌던 곳이며, 대규모 불경 간행도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는 무신정권과 진도와의 인연이 이미 오래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배중손이 진도의 임회(현재의 남도포가 있는 면) 출신이라는 구전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어쨌든

진도에 웅거했던 삼별초는 현재의 진도군 고군면 용장리 일대에 궁성(용장성)을 건설하고 주위에 대규모의 산성(진도 용장성)을

건설하여 응전 태세를 갖추는 한편 그 세력을 확장하여 전라·경상의 해안과 남해·창선·거제 등의 30여 개 섬을 장악하고,

독자적으로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하는 등 명실상부한 해상왕국을 건설하여

몽고에 대항하였다.

 

 

 

 

삼별초의 반란에 당황한 것은 개경의 원종 조정이었다.

반란 당시 이를 진압할 병력조차 제대로 없었던 개경 조정은 몽고에 원군을 요청,

1270년 11월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 앞바다에 진출하 였으나 울둘목에서 삼별초군이 반격으로 대패하였다.

삼별초군은 수차의 전투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방심하기 시작하였다.

 

1271년 5월,

삼별 초군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개경의 정부군과 몽고군은 기습적으로 진도에 상륙,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삼별초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사이도 없이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1270년 8월에 진도 용장성에 웅거, 1271년 5월 제주도 옮기기까지 전후 9개월 간 진도에 머물렀다.

 

 

 

 

진도를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1272년부터 삼별초군은 다시 활동을 제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1273년 2월 여몽연합 군 1만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군을 포위, 공격하여 지도자 김방경은 산중으로 도피하였다가 죽고,

나머지도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됨으로써 4년여에 걸친 항쟁도 종식되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삼별초의 거점이었던 용장산성 등지에서 발견된 기와와 류큐 왕국에서 발견된 기와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삼별초의 잔존 세력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류큐 왕국을 세웠거나,

혹은 류큐 왕국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확실히 검증된 주장은 아니며,

 

삼별초를 몽골에 항거한 영웅으로 그리고 있지만,

당시 제주도를 비롯한 삼별초는 몽골군을 막기 위한 거대한 장성을 쌓는데 제주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기도 하고

민가 약탈을 일삼아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또한

제주 사람들은 몽골군에 의한 피해를 입은 적도 없어 반감도 없어서

 나중에는 민중이 여몽연합군에게 협조하는 태도를 보여 삼별초의 몰락에 기여했다고 볼 수있다.

 

 

 

 

 


 

용장산성 홍보관



행궁터와 용장산성의 지형과 규모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병(私兵)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公兵)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병지」에 나오는

“권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기들을 보호하는 핵심부대로 삼아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간혹 사적인 은혜를 베풀며,

또 죄인의 재물을 빼앗아 그들에게 줌으로써 권신들이 그들을 마음대로 부리게 되어,

김준은 최의(崔竩)를 죽이고, 임연은 김준을 죽였으며, 송송례는 임유무(林惟茂)를 죽였으니,

이는 모두 삼별초의 힘에 의한 것이다.”라는 기사에 의거한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가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이나 마별초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사적 제126호 용장산성 표지석이 잡초에 묻혀 있다.

 

 

 

용장성 행궁지 흔적

1270년 8월에 진도 용장성에 웅거, 1271년 5월 제주도 옮기기까지 전후 9개월 간 진도에 머물렀는데,

 높이 1.6m 총길이 12.85km의 산성을 쌓고

이런 궁을 언제 세울 수 있었을까?

 

* 진도는 삼국시대부터 바다를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라 성이 있어 증축과 보수가 계속 이어져 왔던 성이라

삼별초는 그 성을 개축하는 정도였다네.

 

 

 

멀리 진도 대교 건너 진도 타워가 보인다.

삼별초가 강화도를 출발하여 울돌목을 지나 벽파에 도착하여 성을 쌓고 주둔한다.

 

 

 

용장사(龍藏寺)

 

 

 

 

 

극락전

극락전에 석불좌상이 모셔셔 있다.

 

 

용장사 석불좌상

유형문화재 제17호

 

이 석불 상은 고려시대의 아미타여래상으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사각형 대좌위에 광배를 등에 지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대좌에는 단판연꽃 무늬가 소박하게 묘사되어 있고, 광배는 의자의 등처럼

보이는데 세련된 무늬가 새겨져 있다.

 

현재의 모습은 지장보살처럼 민머리를 하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짙은 눈썹, 작은 눈, 긴 코, 알맞은 입 등이 투박하지만 안정된 모습이다. 가슴이 빈약하게 처리된 반면

어개와 팔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하체는 너무 높고 커서 비례감이 떨어지는 고려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 손을 내리고 무릎 위에 올린 왼 손에는 연꽃이 들려 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발은 큼직하고 투박한 모양으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양 어깨에 옷을 두른 통견의 볌의는 물결모양의 옷 주름이 촘촘하게 표현되어 고려불상 특유의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좌우로 서 있는 두 보살상은 본존불과 비슷한 인상인데 상체는 벗고 하체는 군의를 입은 신라식 보살상을 나타내고 ㅣㅇㅆ다.

좌측편의 불상은 높이 164cm로 얼굴은 시멘트로 보수하여 원형을 알 수 없다.

우측의 불상은 높이 170cm로 역시 얼굴형태를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