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7호 - 남도진성(南桃鎭城)과 배중손 사당(祠堂)
어디 :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 149
진도 남도진성 (珍島 南桃鎭城)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삼별초가 진도를 떠나 제주도로 향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항전을 벌였던 곳으로
현재의 진도 남도진성은 1438년(조선 세종 20년)에 쌓은 후 다시 성을 보수한 것이다.
망대산 하록의 북단에 위치해 외부에서 보면 S자형으로 구부러져 있어
외부로부터는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으면서 진도 남도진성 남서쪽의 망대산과 서망산에서는 적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남도진성은 높이 4~6m, 폭은 2.5∼3m 가량 되는 성으로 둘레가 610m이다.
둥그런 성벽과 동.서.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남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고 서문 양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남아있으며,
성곽의 형태는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사다리꼴이다.
성 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서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옛 성문을 통해 출입했으나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성안의 관아와 객사 및 내아가 복원됐다.
- 디지털진도문화대전 참조 -
△
사진에 보면
예전엔 성안에 민가들이 있었는데, 재정비하면서 주민들을 성 밖으로 이전하였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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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도진성 출입하는 서문
서문에서 북쪽 방향
남문 쪽에서 서문 쪽을 바라보니 성 아래 만호비가 서 있다.
△
남도진성
치(雉)
치(雉) : 적의 접근을 빨리 관측하고 성벽에 접근한 적을 정면 또는 측면에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둘출시켜 장방형으로 내쌓은 구조물
성 안에 들어서니
대학생들이 교수와 함께 남도진성을 살펴보고 있다.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동하는데 남문은 옹성으로 되어있다.
옹성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한겹의 성을 둘러 이중으로 쌓은 성
남문
동문과 서문은 누각이 없는데 남문은 누각이 있다.
서문과 남문사이 담쟁이 넝쿨로 둘러싸인 치를 볼 수 있다.
남도진성 남문의 옹성을 자세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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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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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 성 안에 민가가 있었는데 철거가 된 성 안 풍경
성에서 보니 앞에 조그만 섬이 있는 바다가 보인다.
성 안의 철거된 민가들을 정리 중이다.
성 안 관아 및 객사에서 바라본 남문
새로 조성된 관아와 객사
참 특이하다.
지금까지 나름 전국을 다니며
남아있는 조선 시대 관아와 객사를 보았는데,
위에 사진처럼 겹지붕이나 아래 사진처럼 건물 양쪽에 돌출 처마를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고증에 의해 재건되었겠지만, 일본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것은 잘못된 나의 식견일까?
△
관아의 안채 = 내아
▽
관아와 북쪽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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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운교와 단운교 두 개의 운교(무지개다리)가 놓여있다.
두 개 모두 편마암질의 판석을 겹쳐 세워 만든 것으로 규모는 작지만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특이한 양식이다.
* 단운교는 담지 못했다.
용장성을 나와 진도읍에서 점심을 들고 남도진성을 찾아가는 도중에
진도군 임회면 백동리에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형태를 갖춘 5평 규모의 배중손 사당을 방문했다.
정면에는 정충사라는 현판이 걸렸고 사당의 우측에는 배씨대종회에서 건립한 배중손장군의 동상이 있는데,
주먹을 굳게 쥔 오른팔이 출격명령을 내리고 있다.
1271년 음력 5월 여.몽 연합군이 조직되어 세 방향으로 나눠서 진도를 공격해왔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하였으나 삼별초가 중군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 주력하는 동안,
그 틈을 타서 여몽 연합군의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해왔고, 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여몽연합군에 밀려 용장산성에서 탈출한 삼별초의 퇴로는 크게 두 갈래로 갈리는데,
승화후 온과 김통정, 유존섭 등은 당시 삼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여몽연합군의 기세를 분산시키기 위해
남쪽 왕무덤재를 넘어 갑포로 향했고,
배중손장군 일행은 남도포로 방향을 잡았단다.
남도포로 퇴로를 잡은 배중손장군은 남도진성에서
여몽연합군과 최후의 격전을 벌이다가 패하고 최후를 맞는데, 사당은 남도진성에서 약 3.5km 떨어진 곳이다.
승화후 온과 김통정 일행은
지금의 진도군 의신면 침계리 부근인 왕무덤재에서 여몽연합군과 첫번째 격전을 치르는데, 이 골짜기는 당시 이곳이
삼별초의 피로 물들었다 하여 ‘핏기내·피내·혈천(血川)’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빗기내’라 부렀으며,
여몽연합군의 지휘자인 ‘홍다구가 싸운 곳’이란 뜻으로 다근투골(茶斤鬪骨)이라 불렀다.
이 전투에서 승화후 온과 그의 아들 항이 몽고의 장군 홍다구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후세사람들이 ‘왕온의 묘’가 있다고 해서 ‘왕무덤재’라 부른다.
승화후 온을 잃고 계속 남하하던 김통정 일행이 여몽연합군과 다시 맞닥뜨린 곳은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부근으로
돈지리 마을 앞 들판과 산기슭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무덤들을 마을사람들은 ‘떼무덤’ 혹은 ‘대분통’이라 부르는데
‘삼별초 궁녀 둠벙’도 돈지벌 전투에서 삼별초가 패하자 궁녀들이 만길재에서 우황천이라 불리던
웅덩이로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곳이다.
갑포로 이동하며 두번의 타격을 입은 김통정 일행은
마지막으로 금갑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북문재 정상의 금갑진에 다다라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이곳에서도 패한 김통정 일행은 결국 제주도로 배를 타고 퇴각한다.
삼문
배중손 장군 항몽 순의비
사당 정충사
배중손 장군상
배중손 사당 앞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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