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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일본 규슈)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 天滿宮) - 본전 의식(儀式)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 天滿宮)  - 본전 의식(儀式)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고 아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본전 앞에 이르니 무슨 의식이 있다며 많은 사람이 본전으로 몰린다.

 

일본 여행을 하면서

마치 방콕에 가면 거리 모퉁이마다 절이 있어 참배를 하듯 일본은 신사가 그리도 많았지만 정작 예식 행사는 보지 못했는데,

이번 일본 규슈 마지막 여행 날

다자이후 텐만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번 여행 중의 행운이다.

 

일본 신사에 올리는 의식이 무슨 필요가 있으랴만,

안 보는 것 보다는 보는 것이 낫고,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본전 출입문에서 본 풍경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라서 학생들이 자주 보인다.

 

 

 

마침

텐만구에서 의식이 있다기에 일부러 기다려 예식 장면을 담아본다.

 

 

텐만구 본전

 

 

 

 

 

 

텐만구 본전

젊은 제주가 의식을 올리기 전에 무엇을 읽는 듯 보였으나 읽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주가 엎드려 절을 한다.

 

 

 

절을 마치고 일어선다.

 

 

절을 했던 젊은 제주는 중앙의 옆 방으로 이동한다.

 

 

 

 

 

본 의식

처음 제주는 젊었는데 지금의 제주는 나이가 있다.

 

 

 

본전 앞 마당과 양 측면에도 많은 사람이 예식에 참여하는데,

젊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 연세가 지긋한 어른들로 보아 일본 젊은이들도 전통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본전 측면에도 나이드신 어른들이 많이 참여를 한다.

 

 

 

 

 

도비우메(飛梅)

본전 앞의 매화나무는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가 죽던 날,

교토의 본가에 있던 매화나무의 가지가 날아와 하룻밤 사이에 수천 송이의 매화꽃이 피었다는

 전설이 있는 매화나무이다.

 

 

 

 

 

의식 중 본전 앞 풍경

 

 

의식 풍경

 

 

 

 

 

 

본전 의식의 풍경

의식에 참여하신 분들은 경건한 시간이고 관광객은 구경거리이다.

 

 

 

합격 기원

다자이후텐만구의 명물인 우메가에모치(매화가지떡)를 합격떡이라고 한다.

텐만구 본전 앞에 있는 도비우메 -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가 죽던 날 교토에서 날아왔다 - 를 연상케 하는

일본인 특유의 상술이 보인다.

 

 

 

 

사실

텐만구 의식을 어떻게 올리는지

그리고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지 등은 일본인에게는 중요할지라도 내겐 중요하지도 않다.

 

다만

우리가 모르는 일본 풍습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고, 안 보는 것 보다 보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젠

텐만구 본전 의식을 담은 뒤 본전 뒤뜰에 심어진 많은 매화나무와 풍경을 담으러 후면으로 간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은 나당 연합군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성을 쌓았는데, 그 터가 다자이후에 남아 있다.

백제 유민들과 일본인들은 평지에 수성(水城)을 쌓았다.

백제식 토성으로 성 밑에 수로(水路)를 설치했기에 수성이란 이름이 붙여졌다는데,

 현재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처럼 주택가와 도로변에 흔적이 남아 있다.

 

다자이후로 가는 길 양쪽에 있는 험한 산은 천연 방어막이었기에

일본인과 백제 유민들은 적군이 침입할 수 있는 산 사이의 활짝 트인 평야에 약 1.2㎞의 토성을 쌓았는데,

현재 성터는 남아 있지 않고 나무가 무성한 수림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수성은 1차 방어선이었고, 이것이 무너졌을 때를 대비한 성이 대야성(大野城)이었다.

다자이후역에서 규슈 산책로를 따라 가파른 등산로를 약 한 시간 정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후쿠오카 시내가 잘 내려다보이는 확 트인 고원이 나온다.

둥글게 휜 절벽 밑으로는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근처에는 창고 터도 보인다.

일본식 성은 평지에 세워지고 주변은 해자라는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여기에 남아 있는 대야성 같은 성을 일본인들은 조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일본이 그토록 두려워한 나당 연합군의 침공은 없었다.

 

그후 이곳에 사왕사(四王寺)가 들어서면서 대야산은 사왕사산으로 불렸으며,

다자이후는 나라나 교토처럼 바둑판같이 계획된 도시로 발전했다. 그 흔적이 이곳을 다스리던 다자이후 정청의 초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