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선생 생가와 조의제문(弔義帝文)
언제 : 2017년 5월 3일 수요일
어디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701
새벽 위양지를 사진에 담고
함안으로 가는 도중 뜻하지 않게 연산군 때 무오사화의 단초를 제공한 조의 제문으로 부관참시당했던
김종직 선생 생가 이정표를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2016년 12월 25일 함양과 거창을 여행하다가
탁연 김일손 선생의 위패를 모신 청계서원과 일두 정여창 선생의 위패를 모신 남계서원을 둘러보며 무오사화의 참변과
그들의 스승이었던 김종직 선생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우연히
생가를 방문하게 되어 가슴 설레었다.
큰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서니 마을 입구에 큰 느티나무와 멋진 정자가 반겨준다.
마을 입구 주차장에 차들이 많이 있어 김종직 선생 생가를 찾는 사람이 예상외로 많다는 생각을 하며
다가가니
오늘이 석가탄신일이라 가까이 있는 정각사를 찾는 차들이었다.
추원재 마당에 핀 자운영꽃
추원재 김종직 생가
멀리서 보니 기와집에 솟을대문도 있어 후손들이 생가를 잘 보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
생가 앞 김종직 선생 흉상과 비
♣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부북면 제대리 한골에 있는 추원재(追遠齋)는
조선조 성리학의 초조(初祖)인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 1389-1456)가 처음 거처를 정하였고
그의 아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태어나고 자라고 별세한 집터이다.
여러 차례의 전란을 겪고 오랜 세월의 변천으로 생가 등 유적의 원상을 지키지 못하다가
순조 10년(1810년)에 선현의 유적이 황폐한 것을 개탄하고 사림(士林)들과 후손들이 합의하여 전래하는 건물을 개조
중건(重建)하여 추원재(追遠齋)라 하고 당호(堂號)를 "전심당(傳心堂)"이라 하였다.
"전심(傳心)"이라 함은 동방의 성리학(性理學 : 心學)이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에게 전했으며 아들 점필재에게 전하고,
점필재는 김굉필(金宏弼)과 정일두(鄭一竇), 탁영 김일손(金馹孫)에게 전했으니
점필재는 조선조 심학의 전수자(傳授者)라는 뜻이다.
아버지 숙자는 고려말·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길재(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종직은 길재와 정몽주(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김종직은 지역에 근거를 두고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이끈 유학자들인 재지사림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대스승이다.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고,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사림파가 형성되면서 훈구파와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제자들과 지방자치조직인 유향소를 다시 세워 향촌사회에 성리학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는 생전에 항우가 초나라 회왕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것을 비판하는
<조의제문>을 지어 기록으로 남겼는데,
사후인 1498년에 사관으로 있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고 숱한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계단이 제법 높다.
김종직 생가에 들어서니 멀리서 보고 생각했던 것 보다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6칸 기와집에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한데 한그루 감나무가 텅빈 집안을 지키고 있다.
추원재(追遠齋)
현판은 생가 전면에 걸려 있다.
전면에 마루가 있고 뒤에 방이 있는 두 칸 형식의 기와집이 일반척인데
일반적으로 보았던 구조가 아니어서인지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생가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전심당(傳心堂)
마루 안 한쪽에 걸려 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조선 시대 성리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년 ~ 1492년)이 지은 제사문으로
향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초 의제를 추모하는 글이다.
【개요】
김종직은 조선의 성리학자로 1459년 세조 5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1489년 성종 20년 이르러서는 중용되어
형조판서까지 벼슬을 하였다.
1492년 김종직이 죽은 지 6년 후 1498년 연산군 4년에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이것을 성종실록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내용은 항우에게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회왕 즉, 의제(義帝)를 조상한다는 제문이었지만,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꼬는 내용으로, 살해당하여 물에 던져진 단종에 대한 상황 묘사와 유사한 면이 있어
세조의 후인들은 정통성을 부정당하는 내용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관을 부수어 시체의 목을 벰)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참화를 당하였다.
그 이유를 보면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그의 조카였던 단종을 권좌에서 몰아낸 계유정난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자신들의 정치행태를 비판해왔던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내세운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이어져
김일손·권오복(權五福) 등이 죽음을 당하고 정여창·김굉필·이종준(李宗準) 등이 유배되는 등 일단 사림파의 후퇴를 가져왔다.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종직의 학문은 무오사화 때 그의 많은 글이 불살라진 관계로 전체적인 모습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대체로 정몽주와 길재의 도학사상(道學思想)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와 명분을 중요시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고 했다.
또한 〈소학〉과 사서(四書) 및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기반으로 하는 성리학의 실천윤리를 강조하였으며,
오륜(五倫)이 각각 질서를 얻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이 자기의 직분에 안정하도록 하는 인정(仁政)의 실시가
이상적인 정치라고 보았다.
이를 위해 향교 교육과 인재의 등용을 매우 중시했다.
한편으로는 경술(經術)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당시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에서 꼭 필요하였던 사장(詞章)의 학문을 겸비하기도 하였다.
김종직의 문학세계는 명분·절의·수기(修己)에 근간을 두는 여말선초의 처사문학(處士文學)과 송시(宋詩)의 영향을 받아
화려한 문채(文彩)를 배격하고 간결하면서도 함축된 이(理)를 드러내는 것이었으나,
경(經)과 문(文)을 다같이 중시하는 폭넓은 것이었다.
김종직의 학문은 정통 성리학의 입장을 견지한
김굉필·정여창,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린 김일손·유호인·조위,
사회적인 체제와 구속을 벗어나려는 방외인문학(方外人文學)의 입장에 선 남효온(南孝溫)·홍유손 등 여러 갈래로 이어졌다.
이러한 사림파의 학문은 무오사화·갑자사화로 한때 침체했다가,
김굉필에게서 배운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 등에 이르러서 크게 융성했다.
밀양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 백연서원(栢淵書院), 김천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편서에 〈동문수 東文粹〉·〈일선지 一善誌〉·〈이존록 彛尊錄〉 등이 있으며, 총재관(摠裁官)으로서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조의제문(弔義帝文)
정축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으로부터 경산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이르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간 서로 떨어진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만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옛날 조룡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어라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어찌 보전하겠는가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항량(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양흔낭탐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오호라!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할까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옵컨데 영령은 와서 제사음식을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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