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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논산)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遯巖書院)

 

사적 제383호 돈암서원(遯巖書院)

 

 

 

 

언제 :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어디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3길 24-4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毁撤)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祠宇)·양성당·응도당(凝道堂)·장판각(藏板閣)·정회당(靜會堂)·산앙루(山仰樓)·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 등과
하마비(下馬碑)·송덕비(頌德碑)가 있다.


1634년(인조 1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 이전 연산면에는 김장생의 아버지인 계휘(繼輝)가 설립한 경회당(慶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1634년 양성당과 경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하게
되었고, 1660년(현종 1)에 ‘돈암(遯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하였다.
1658년(효종 9)에 김집(金集)과 1688년(숙종 1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에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가 배향하였다.

 

 

 

돈암서원

 

돈암(遯巖)

서원이 창건되었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하임리 숲말 산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현재 서원의 자리에서 서북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홍살문과 하마비

 

 

 

경내 배치도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예학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워 조선 중기 예학과 성리학의 거두가 되었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역임하여 요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 영향력이 매우 커서 인조 초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우암 송시열에게 전해져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에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산앙루

 

 

 

돈암서원은 호서 지역은 물론 기호 지역 전체에서 존숭받는 서원으로,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 중에서 가장 비중 있고 영향력 있는 서원으로 인정받고 있다.

 

 

 

연산 돈암서원 비(連山 遯巖書院 碑)

 

 

 

외삼문 - 입덕문(入德門)

 

 

 

정의재 -양성당과 돈암서원 원정비 -거경재

 

정의재(精義齎)-서재

'정의' 란 자세한 의의라는 뜻으로 유생들이 모여 경전의 의의를 자세히 강론하던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거경재(居敬齎) -동재

'거경' 은 성리학의 수양 방법 중 하나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을 말하며,

유생들이 학습하던 공간이다.

 

 

 

양성당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

문화재자료 제366호 - 조선시대

 

조선시대 중기 문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문하생들이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사계와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비이다.

연꽃 무늬가 새겨진 방형의 비 받침대에 대리석 비석과 비 머리가 서 잇다. 이들은 예학과 성리학의 대가로 고향에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는데, 비문에는 장중하고 온화한 사계와 치밀한 신독재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현종 10년(1669)에 세웠는데,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으며,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金萬基)가 썼다.

이 서원은 숲말에 있던 것을 홍수 때 물이 차므로 고종 17년(1880)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는데, 그때 비석도 옮겨왔다.

현재의 건물들은 비문에 적혀 잇는 건물 배치와 다르다.

 

 

 

내삼문

 

 

 

숭례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사당내부

주향(主享)인 사계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위패가 모셔져 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담장에는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12개 글자를 새겨 놓았다.

 

地負海涵(지부해함) : 땅이 온갖 것을 등에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博文約禮(박문약례) :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瑞日和風(서일화풍) : 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전면에서 본 응도당

 

 

 

좌측면에서 본 응도당

 

 

 

우측면에서 본 응도당

돈암서원에서 가장 빼어난 건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응도당은 다른 서원 건축양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 옆면에

하나를 덧댄 가첨지붕(눈썹처마) 구조와 지붕형태를 가지고 있다.

대들보는 크고 웅장하며, 생동감 있는 비늘 무늬는 살아있는 용이 꿈틀대는 듯 익공의 화려함과 화반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창방위에 놓인 화반형 조각은 기둥사이마다 1개씩 얹었다.

 

 

 

응도당에서 바라본 서원 전경

 

 

 

정회당(靜會堂)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선생의 부친인 황강공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자락의 고운사터에서 1954년에 옮겨 왔다.

정회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었다.

 

 

 

장판각(藏板閣)

향토유적 제9호

 

장판이란 판을 간직하여 보관한다는 뜻으로, 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황강실기' 김집의 문집인 '신독재전서' 등과 '경서변의', '가례집람', '상례비요' 등이 보관되어 오고 있다.

장판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전사청

 

 

 

 

 

관리사무소

 

 

 

 

그동안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서원을 보았는데,

대체로

 서원이 너무 좁다는 느낌이었다면, 이곳 돈암서원은 잘 정비되었고 학동들이 뛰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여유스러운 서원이었다. 

 

過猶不及(과유불급)

돈암서원을 둘러보기 전에 점심을 들어야 했는데,

계백 장군 유적지에서 돈암서원 가는 길에 점심을 들기로 하여 떠났는데 식당을 찾지 못하고 돈암서원에 도착했다.

할 수 없이

많이 보겠다는 욕심에 끼니를 거르고 돈암서원을 둘러 보고 나니 15:45

 

도로변에 마을은 있는데 식당이 없다.

한참을 다니다 조그만 어느 면 소재지에 닿으니 식당이 있다.

 

16:00

생선구이를 주문하고 맛나게 늦은 점심이라도 들려는 생각이었는데, 배는 고픈데 생선구이가 너무 부실하다.

 해가 기울어 마지막 남은 개태사를 돌아보지 못하고

귀갓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