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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충남 여행

(충남 논산) 견훤왕릉과 후백제

 

견훤왕릉과 후백제

 

 

 

언제 :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어디 :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 18-3

 

 

후백제와 견훤은

60년대 학창시절 국내사에서 후백제 견훤에 대해 잠깐 언급되고는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을 시청하다가 후백제 견훤을 다시 접할 수 있었고, 2013년 김제 모악산과 금산사를 여행에서

견훤이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낼 정도였으니

 솔직히 기억 속에 잊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관촉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논산 관광 여행 지도에서 견훤의 묘가 논산 연무읍 야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예정에 없던

견훤왕릉을 찾아 나섰다.

 

 

 

 

 견훤왕릉은 연무대역에서 2.8km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너른 평야에 산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얕으막한 언덕에 견훤왕릉 이정표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걱정이 심하여 등창이 나 수일 후 황산의 한 절(지금의 개태사로 추측)에서 죽었다.”라고 적혀 있다.

 죽을 때 후백제를 일으킨 산이 그립다고 하여 전주의 완산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완산의 칠봉이 보이는 이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또한 1454년(단종 2)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은진현조〉에

“견훤의 묘는 은진현의 남쪽 12리 떨어진 풍계촌에 있는데 속칭 왕묘라고 한다.” 라고 하였으며,

1757년에 간행된《여지도서(輿地圖書)》에

“현남 12리에 견훤묘, 현남 13리 금곡사우”라고 밝혔으나 확실치 않다.

 

 

 

 

차를 주차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멀리 눈 끝에 산들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는 야트막한 언덕 위 너른 곳에

견훤왕릉이 보인다.

 

 

 

경주 대릉원과는 비교되지 않지만,

기호지방에서 보기 어려운 큰 봉분을 한 견훤왕릉이 보인다.

 

 

 

 

견훤왕릉

1981년 12월 21일 충청남도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되었으며, 논산시 연무읍(鍊武邑) 금곡리 산에 있다.

지름 17.8m, 둘레 70m, 높이 4.5m이다.
주변에 아무 시설이 없고 큰 봉분 앞에 1970년 문중에서 세운 비석 ‘後百濟王甄萱陵’이 있다.

 

 

 

 

 

 

 

 

견휜의 원래의 성은 이(李)씨이며,

상주 사람으로 신라 장군 이아자개의 아들이라 한다.

 

고려시대 이전까지 성을 갖고 있는 경우가 적기도 하였지만 기록에 성을 생략한 경우가 더 많았다.
대표적으로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이름이고 그의 성은 이씨다. 즉 그는 이아자개 라고 부르는개 더 명확한 이름표현법이다.

 

시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 따진다면 사다함이나 관창같은 유명한 화랑들

사다함은 김사다함이며 관창은 김품일의 아들 김관창이다. 즉 기록에는 이름만 적고 성씨를 생략한 경우가 매우 많았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은 성씨가 생겨난 이래로 고려시대때까지 성을 일부 귀족들만 갖고 있었고

이러한 성씨 표현이 그당시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

 

 

 

 

견훤(甄萱. 867-936)과 후백제

 

옛날에 한 부자가 광주 북촌에 살았는데 딸이 한 명 있어 외모가 단정했다.
(그 딸이) 부친에게 이르되 매양 자주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교혼(交婚)한다 했다.

부친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남자의 옷에 찔러두라'라고 했다. (그 딸이) 그리했던바 날이 밝아 실을 찾아보니

바늘이 북쪽 담 아래의 큰 지렁이 허리에 찔려 있었다. 그 후 임신이 되어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에 자칭 견훤(甄萱)이라고 했다.

 

견훤(甄萱)은 후백제를 세워 통일신라, 후고구려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무장이다.

그는 원래 신라 사람으로 아버지는 농민군 출신의 장군 아자개(阿慈介)이며,

상주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에서 태어났다.


커갈수록 풍모와 기개가 남달랐던 견훤은 장성해 군인이 되었다.
그는 신라 서남해 지방의 방어를 맡아 공을 세우고 비장(裨將)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부터 큰 뜻을 품기 시작한 견훤은

신라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형성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주로 전라도 지역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견훤이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무리가 달포 사이에 5,000명이나 되었다. 

 

 견훤은 892년(진성왕 6)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광주(光州)를 공격해 차지하고 나라를 세울 기반을 다졌다.

 어느날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로 순시를 나갔는데,  
사람들이 그를 몹시 환영하여 큰 자신감을 얻어 내친김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이름을 후백제라 지었다.

 

이때가 900년(효공왕 4)으로,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운 것보다 1년이 앞섰다. 

견훤은 이어 중국 남쪽에 위치한 오월국(吳越國)에 사신을 보내 후백제 건국을 인정받았다.

외교적으로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다.

 

918년, 궁예가 폭정을 일삼아 민심을 잃자 그의 수하였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의 왕이 되었다.

 

927년, 견훤의 위세는 날이갈 수록 강대해

신라 경주 포석정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왕위에 앉히고 돌아오는 길에 신라를 지원하려 온

왕건의 군사를 크게 물리치고 왕건도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신라는 견훤에 의해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경순왕 역시 사실상 견훤이 옹립했다. 

그러나

929년, 고창(안동) 전투에서 왕건에게 대패 후 견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견훤에게는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견훤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략이 뛰어난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세 형 신검(神劒), 용검(龍劒), 양검(良劒)이 반발해 반란을 일으켜 935년(태조 18),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동생 금강을 죽인 후 권력을 차지했다.

 

금산사에 갇혀 있던 견훤은 사위의 도움으로 고려로 도망쳐 왕건에게 의탁했으며, 
936년(태조 19)에 왕건이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견훤과 함께 공격했을 때, 후백제의 장군들이 싸우지도 않고 항복을 하여
  결국 신검은 두 아우와 함께 항복하였다.

이렇게 44년 동안 지속되었던 후백제의 역사는 끝이 났다.
 

 

 

 

견훤은 완산주(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약 43년간 후백제를 세워 나라를 다스렸다.

 

커다란 봉분 앞에 1970년 견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이 서 있을 뿐,

주변에는 아무 시설이 없어 쓸쓸하였지만, 남쪽으로 멀리 전주 모악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처음 계획은 계백 장군 묘와 사당을 방문하려다가

 견훤왕릉을 방문할 수 있어 일정에 차질이 생길지라도 참 잘되었다는 생각이다.

 

금산사는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유폐된 곳으로

금산사 미륵전 뒤로 보이는 산이 모악산(794m) 정상으로 왕건이 죽을 때 이 모악산이 보이는 곳에 자신을 묻으라고 했다.

 

견훤왕릉은

아무 시설도 없는 봉분과 비석이 전부이지만, 이번 기회에 후백제와 견훤에 대해 공부할 수 있음이 더욱 큰 기쁨이다.

 

이젠 백제의 상징 황산벌과 계백 장군을 찾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