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 미륵 도량 관촉사(灌燭寺)
언제 :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어디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
처음 관촉사 은진미륵(恩津彌勒)을 접한 때는 국민학교 4~5학년 때 사회책에서다.
석굴암이나 다른 불상은 반듯하고 잘 생기셨는데,
은진미륵은 머리도 길고 얼굴도 불상과 다르며, 전체 체형이 기형이라 궁금하여 언제가 한 번 찾아가 보리라 했는데
어언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밤
정월대보름인줄도 모르고 논산 여행길에 나섰는데, 지인이 보낸 보름달 사진을 보고 정월대보름인 줄 알았으니
나도 무심하지만,
아내도 나의 역마살에 가둬두길 포기하고 방목하고 있는지.
새벽녘
논산 서넠 정월대보름달을 담아 아쉬움을 삭힌다.
당연히
대한국민으로 입대하면서 논산 연무대에 집결하여 여산 육군 제2하사관학교를 수료하였으며,
또한
아들 연무대 입대 배웅 차 논산을 다녀갔으니 전혀 낯선 곳은 아니다.
지난밤
술 기운이 남아 소고기 국밥으로 속을 달래고,
55년 긴 세월을 기다렸던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천년 고찰 관촉사를 찾아간다.
반야산 관촉사 일주문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인 관촉사(灌燭寺)는 고려 968년(광종 19) 혜명에 의해 창건하였으며,
당시 조성한 ‘은진미륵’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천왕문
반야루(般若樓)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높다란 반야루(般若樓) 밑을 통과한다.
반야루 밑을 지나는데
한쪽 벽에 관촉사 미륵불과 혜명스님에 대한 만화가 붙어있어 담았다.
반야루 밑을 통과하니
두 발 땅에 딛고 두 손 허리에 올린 장군 같은 대광명전이 나타난다.
△
대광명전(大光明殿)
대광명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주불로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부처님은 산스크리트어로 '마하바이로차나(Mahāvairocana)'라고 하며 '두루 빛을 비추는 존재'라는 의미이며,
'태양'을 뜻하기도 하다.
▽
우리 나라 사원에서 이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각의 명칭이 붙여질 경우에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게 된다.
법당 안의 비로자나불상은 보통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는데,
고려 말기부터는 이 지권인이 변형되어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모습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 비로자나불상 뒤에는 비로자나 후불탱화가 봉안되는데, 이곳에는 보통 화엄경의 설법 장면이 많이 묘사된다.
반야루
佛光普照(불광보조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누리에 비추다)
관촉사는 풍요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너른 들과 멀리 계룡산이 마주 보이는 반야산 품에 안긴
단출하고 아늑한 절이다.
미륵전
석조미륵보살입상 정면에 미륵전이 있으며, 안에서 미륵보살입상을 보면서 예불을 올리는 곳
미륵전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미륵보살을 바라보며 예불을 드린다.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란 불교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오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석문(石門)
문화재자료 제79호 - 조선시대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맨 위쪽에 세워진 석문으로,
사찰에 들어가기 위한 문이라는 뜻의 해탈문(解脫門)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문 입구의 양쪽 돌기둥은 너비 48cm인 직사각형의 돌을 양쪽 기둥으로 세웠고, 윗면 천장에는 길게 다듬은 돌 5개를
가로로 걸쳐 얹어 4각형의 천정을 이루어 마치 터널의 모습과 비슷하다. 천장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재를 다듬어 벽돌
쌓은 형식으로 쌓았으며, 입구의 양옆으로도 벽을 연결하여 경내를 보호하는 석벽의 모양을 내였다.
이 석문은 사찰의 중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문이다.
제작 축조 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시대에 조성한 사찰 내의 석조미륵보살입상과는 관련이 없는 후대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범종
경내 풍경
명부전
삼성각
아~!
드디어 그토록 궁금했던 은진미륵이 미소로 반긴다.
석조미륵보살입상 : 보물 제218호 - 석등 : 보물 제232호 - 배례석 : 유형문화재 제53호
배례석(拜禮石)
고려시대 - 유형문화재 제53호
부처님께 예(禮)를 올리던 곳에 놓은 직사각형의 받침돌로
바닥에서 2단의 직각 괴임을 새기고, 그 사방의 면석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웟면에는 가운데 커다란 연꽃을 중심으로 좌우에 그보다 작은 연꽃 두 송이를 돋을 새김 하였다.
연꽃은 단판(單辦) 8엽(葉)이며 중앙에는 커다란 둥근 자리(圓座)가 있고, 그 안에는 가운데 1개와 그 주위에 8개의 자방(子房)이
연주문(蓮珠文)처럼 돌려져 있는데, 음각으로 새겼다.
연꽃의 잎 끝이 뾰족하며 그 사이에 다시 중판(重辦)의 연꽃잎을 뾰족하게 돌을 새김하였다.
제작연대에 대한 말이 많으나 제작기법으로 보아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석탑
현재는 4층 석탑으로 보이지만 기단부가 2층 기단이며, 전체적인 체감비로 보아 5층석탑으로 보인다.
옥개석의 체감비로 보아 3층의 옥신과 옥개석이 없어진 듯하다.
고려시대 석탑이나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
- 관촉사 해설자의 설명에 의하면 다른 곳에 있던 석탑을 옮긴 것이라고.-
석등(石燈)
보물 제232호 - 고려시대
석등이란 어두운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 불성을 밝혀주는 등인데,
처음에는 실용적 성격이 강했으나 후대에는 불전(佛殿)이나 탑 앞에 설치하는 장식적인 건조물로 변했다.
정사각형의 하대석(下臺石)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겼다.
기둥돌은 둥근 형태의 상.중. 하 3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화사적(火舍石)은 상하 2층으로 되어 잇는데, 네 기둥이
빈약한 반면 화창(火窓)이 매우 넓다. 1.2층 지붕 돌의 네 귀에는 귀꽃이 큼직하게 서 있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원과 4각 . 8각이 혼합되어 구성되었으며, 안정감이 약간 부족하나 전체적으로 크고 장중한 감을 주고 있다.
또한 화사석의 기둥이 가늘어 불안한 느낌을 주지만 형태의 장대함과 수법의 웅장함미 고려시대 제일가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사적비에 의하면 불상이 968년(고려 광종 19)에 조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고려시대 석등의 대표작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8호 - 고려시대
높이가 18m에 이르는 국내 최대 석불로서, 보통 "은진미륵'이라 불리고 있다.
미륵불은 56억 7천만년이 지난 뒤에 그 때까지도 못다 구제된 중생들을 위해 나타난다는 미래불로 대개 산이나 들 등
바깥에 세워진 경우가 많다.
자연암반 위에 허리부분을 경계로 하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이 보살상은
몸통에 비해 특별히 얼굴이 강조되어 전체적인 균형미는 약간 떨어지지만 불상 전체에서 느껴지는 강한 원초적인 힘은
고려시대 초기에 이 지방에서 많이 유행하는 불교예술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얼굴과 손에 집중된 표현양식은 마치 토속적인 신상(神像)을 보는 듯 위압적이며,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강한 메시지와 신비감을 담고 있는 모습이다.
관촉사 사적비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공사를 시작하여 목종 9년(1006)에 완성하였으며,
혜명대사가 대형 석불을 만들어 세울 수 없어 걱정할 때 사제촌에 나타난 동자들이 강가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아 기뻐하며 돌아와 불상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와 같은 거석불(巨石佛)은 대표적인 예로 인근에 있는 부여 임천의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을 들 수 있는데,
이 두 불상은 고려시대에 충남지역에서 크게 유행하던 불상의 양식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관촉사 불상의 건립은 이후 충남 각 지역에서 거불상의 조성에 큰 계기가 된 듯 하다.
삼성각에서 본 은진미륵과 석등
풍요의 물결이 넘실거린 너른 들과 그 너머 멀리 공주 계룡산이 조망된다.
관촉사 전경
고려 말 이색이 남긴 시와 조선 중엽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은진(恩津), 불우조(佛宇條)에서 관련 기록을 볼 수 있으나
보다 자세한 연혁은 1743년(영조 19년)에 세워진 "관촉사 사적비명"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도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할 뿐 사찰 창건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
요사채와 장독대
▽
아침 햇살이 비치는 미륵불상 얼굴의 알듯 모를 듯
미소는 왜 이제 왔는가! 아니 이제라도 찾아와 반갑다는 듯 자비로움을 더해준다.
은진미륵을 처음 접한 후 55년이 지나 뵙게 된 기형적 미륵불을 본 영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반갑고 기쁘다.
해설가에 물으니
머리 위 높게 뭔가 올라 그 위에 관을 씌웠는데 그 뭔가가 뭐냐고 물으니 상투란다. 그리고 원래의 은진미륵 상에는 상투처럼
그곳에 망이 있었는데, 치워진 것이란다.
문득
보물 제93호인 경기도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생각났다.
그곳 불상도
불성(佛性)보다는 민간 신앙적인 냄새가 짙은 기형적 불상이며, 절에는 무속적인 요소도 많기에 그곳을 지키는
조그만 절은 아마도 나중에 세워졌을 거라는.
내가 어렸을 적 책에서만 배웠던 흥미로운 "은진미륵"을
직접 찾아와 가까이 보면서 어렸을 적을 잠시 추억하는 일도 행복한 일이다.
다음에는 후백제 견훤왕릉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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