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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부산+경남 여행

(경남 함양) 사적 제499호 남계서원(藍溪書院)

 

사적 제499호 남계서원(藍溪書院)

 

 

 

 

언제 : 2016년 12월 25일 일요일

어디 : 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함양 상림숲을 구경하고 화림동계곡을 가다가

남덕유산과 지리산이 보이는 너른 들 한켠에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이정표를 보고 지나칠 수 없어

두 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남계서원은 일두 정여창, 청계서원은 탁영 김일손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모두 무오사화때 죽임을 당했다.

 

 

 

 

함양 남계서원 - 사적 제499호

원은 조선시대의 사설 교육기관이자 선현들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남계서원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이며 동방 5현으로 불리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추모하기 위하여

1552년 개암(介菴) 강익(姜翼)을 비롯한 지방 유생들이 건립하였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서원으로 1566년에 명종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사액 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정유재란(1597년) 때 소실되었으나 1612년 현재 자리에 다시 세웠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처례령 때 헐지 않고 존속한 서원 중 하나이다

 

 

 

 

출입문인 풍영루와 강당, 동재, 서재, 경판고(장판각),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급한 경사지에 사당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출입문까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였는데, 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며,

이후 각 지역에 건립되는 서원은 대부분 이러한 배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남계서원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 

 

 

 

 

 

풍영루(風詠樓)

2층 누각으로 출입문이다.

 

 

 

풍영루를 들어서면

왼쪽에 묘정비와 서재 - 중앙 강당 - 오른쪽엔

 

 

 

묘정비(廟庭碑)

남계서원에 일두 정여창,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 세 분을 모시고 향사를 올리고 있음에도 이를 찬양하는 숭덕비가 없어

안타까워하다가 남계서원 건립 200여 년이 지난 1779년에 묘정비를 세우면서 글을 새겼다.

비문은 조선 후기 정조 때 문관 김종후가 지었다.

 

 

 

강당

강당은 경(敬)과 논(論)을 연구하고 학습하는 곳으로 명성당(明誠堂)이라고 하며,

중용의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라는 뜻이다.

강학영역을 구성하는 중심 건물로 1559년에 완성되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2칸은 대청마루이고, 양쪽 각 1칸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오른쪽 방은 '거경(居敬)'이라 하며 '경(敬)에 거(居)해서(理)를 깊이 연구한다.' 는 뜻이고,

동쪽 방은 '집의 (集義)'라고 하며 '호연지기는 도(道)와 짝이 되는 의(義)를 축적해야 생기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강당내부

 

 

 

동재(東齎)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동쪽에 있어 '동재'라고 한다.

동재는 '양정재(養正齎)'라고도 하는데, 이는 "역경(易經)"에 나오는 '교육을 함으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동재는 서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1칸은 '애련헌(愛蓮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정여창 선생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영향을 받아 매화와 연꽃을 사랑하여

두 이름을 애련헌과 영매헌이라고 지었다.

 

 

 

서재(西齋)

유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강당의 서쪽에 있어 '서재'라고 한다.

서재는 '보인재(輔仁齎)'라고도 하는데, 이는 "논어(論語)"에 나오는 '군자는 글로서 벗을 사귀고 벗으로서 인을 돕는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재는 동재와 같은 2칸의 건물로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니 1칸은 '영매헌(詠梅軒)'이라고 이름 붙인 누마루로 되어 있다.

영매헌과 애련헌은 '연못을 파고 못 옆에 둑을 쌓아서 연을 구경하고 매화를 읊조릴 만하다'라는 뜻이다.

 

 

 

경판고(經板庫)

경판고는 '장판각'이라고도 하며, 서원에서 보유하는 책이나 판각 등을 보관하는 곳이다.

유생들을 교욱한 "어정오경(御定五經)"등의 서적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박물관으로 옳겨 보관하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건물을 지면에 붙이지 않고 4면을 모두 터놓아 공기의 유통이 자유롭게 하여

판각을 보간하기 쉽도록 하였다.

외부 벽체는 나무로 구성한 판벽으로 되어 있고 내부 역시 가운데 판벽이 있다.

 

 

 

남계서원 뜰에는 노란 민들레가 엄동설한에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 배치에서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을 구별한 남계서원  

 

내삼문

 

 

 

사당

선현의 위퍠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주벽은 조선 5현의 한 분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모셨고, 서쪽은 1675년 (숙조 1)에 동계 정온 선생을 ,

동쪽은 1689년(숙종15)에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을 모셨다.

강익선생은 정온선생의 외삼촌이다.

 

 

 

사당에서 내려다 본 남계서원

다른 서원에서는 보기 드물게 남계서원에는 연지가 동재와 서재 아래 각각 조성되어 특별함을 보인다.

 

 

 

 

사화(士禍)

 

조선 시대에는 모두 네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다.

연산군 4년인 1498년의 무오사화,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1545)의 을사사화다.

사림(士林) 세력이 화를 입었다는 뜻에서 ‘사화(士禍)’라고 부른다.

다만 무오사화는 사초(史草)가 화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무오사화(/禍)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앙 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공신 출신의 훈신(勳臣)과 국왕의 인척, 외척 출신인 척신(戚臣)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金宗直)과 그 문하의 영남 사림들을 대거 등용했으나,

연산군에 이르러 1498년 유자광을 중심으로 훈척세력이 김종직을 중심으로 사림세력을 몰아낸 정치적 사건이다. 

 

연산군에 이르러 

평소 사림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연산군은 김일손과 표연말(表沿末), 정여창(鄭汝昌), 최부(崔溥) 등 김종직 일파 20여 명을 비롯해

모두 40여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시켰다.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되자 조정에는 언론 기능이 상실됐고,

연산군은 날마다 연회를 열어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모았으며,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다.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여창(鄭汝昌, 1450년-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으로 아버지 정육을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 뒤 갑자사화로 부관참시된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 하성위 정현조, 정숭조,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이관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풍영루는 창건 당시 이름인 준도문이라는 현판이 안쪽으로 걸려있다

2층 누각은 손님이 오면 학문을 토론하고 정담을 나누거나 유생들이 공부를 하거나 쉬기도 하는 곳이었다.

 

 

 

청계서원에서 바라 본 남계서원

 


 - 남덕유산-

 

 서쪽으로는 멀리 지리산이 보이고

북으로는 남덕유산이 조망되는 곳에 남계서원이 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백운동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서원인데

소수서원이 건립되고 9년후인 1552년에 개암 강익과 함양 유림들의 주도로 지어졌으며,

1566년(명종 21년)에는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일두 정여창을 배향하는 서원이 전국에 아홉 군데가 있는데, 그 가운데 남계서원이 중심을 이룬다.

정여창의 호는 ‘일두'인데, ‘한 마리의 좀’이라는 뜻이다.

정여창이 스스로를 낮추어 불리고자 지은 호로,

중국 북송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정이천의 ‘천지간에 한 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 지리산이 아주 희미하게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