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벽루(寒碧樓)를 찾아간 청풍문화재단지
언제 : 2016년 3월 23일 수요일
어디 : 충청북도 제천시 청풍문화단지
초목의 싹이 돋기 전에 산의 속살을 보기 위해 해마다 떠났던 여행,
올해는 여행 중 스쳐 지나기만 했던 충청북도 제천 청풍호에서 유람선을 타고 옥순봉과 구담봉 그리고 청풍문화단지와 의림지,
소백산 산행과 죽령 그리고 구인사와 고수동굴을 여행하면서도 차 안에서 바라만 보았던 도담삼봉과
사인암을 보기 위해 2박 3일 여정으로 새벽길을 나서 제천에서 첫 일정으로,
보물 제528호 한벽루(寒碧樓)가 있는 청풍문화재단지를 찾아갔다.
이번 주간은 날씨가 좋겠다는 일기예보에 일정을 잡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제천엔 바람과 미세먼지로 시야가 좋지 않아 아쉬웠다.
청풍대교
금성면과 청풍면을 잇는 왕복 2차선 청풍대교(길이 482.4m, 폭 14m)
팔영루(八詠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
이곳은 청풍부를 출입하는 관문이며 '남덕문' 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처음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팔여루사적비'에 의하면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기홍이 중건하고
'남덕문'이라 한 것을,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고 사적비를 세웠다. 그 후 부사 민치상이 청풍팔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가 있어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청풍면 읍리 286번지의 북쪽에 있었으나,
1983년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2m의 석축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고 문 천장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누각이다.
연자방아
수몰된 지역에 있던 고가 4채가 복원 되어 있는 마을 앞에 있는 연자방아.
제천 황석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 ,
도화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
후산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5호),
지곡리 고가(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가 그대로 옮겨 복원되었다.
▽
복원된 고가(古家)
흙과 돌로 쌓아 볏짚으로 덮은 담과 옛날에 사용했던 유물들이 전시되어 성인에게는 추억을,
학생에게는 교육의 장이 되어 참으로 유익한 곳이다.
제천 지곡리 고가(古家)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
이 집은 본래 수산면 지곡리 웃말에 있던 민가주택이다.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5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며,
사랑채와의 사이에 담장으로 경계를 두었고, 중문으로 출입하도록 꾸며져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ㅡ 자형의 초가로
되어있다. 행랑채는 대문간 우측으로 외양간과 방앗간이 있고, 상부에 다락을 꾸미고 있다.
이 집의 행랑채의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 있는 일반형이라고 할 수 있다.
홀태기
벼 타작 일이 기계화되기 이전에 벼 낟알을 떨어내는 수동 탈곡기
정겨운 장독대와 장독
쟁기
제초기
디딜방아
입구의 모습
절구와 절구통
볏짚으로 만든 용기들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사람들
김중명
1614년(광해군6) ~ 1685년(숙종11)
김중명은 청풍 김씨로 자는 이회였다. 아버지 김전은 병자호란 당시 빙고의 별제 벼슬을 지내던 사람으로,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문안하려고 급히 가던 길에 청병을 만나 힘껏 싸우다 전사했으며 호조참판을 추증받았다.
그때 중명은 부친의 시신을 메고 양주 금촌까지 가서 장사지냈다.
인조 을유년 무과에 올라 선전관에 발탁되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성묘갔던 길에 묘 뒤에 숨어 있던 큰 범을 만나게 되었다.
따라 온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하자 중명이 말에서 내려 고함을 크게 지르며 곧장 나아가
발로 그 놈을 차서 죽여 버리니 그 용맹에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효종이 중명의 힘을 시험해보고자 부르자. 중명은 모래흙 세 포대를 가져다 양쪽 겨드랑이에 한 포씩 끼고 나머지 한 포는
등에다 지고는 대궐 밖에서부터 전각까지 걸어오니 임금이 장하게 여겼다.
이로부터 날로 총애가 깊어져 병마절도사 벼슬까지 받게 되었다. 기해년 효종이 승하하자 중명은 팔뚝을 어루만지며
"내 일은 이제 끝났구나!" 하고 크게 울부짓더니 결국 청풍고을의 백치에 물러나 살다가 생을 마쳤다.
출처 : 「매산집」조선무신 홍직필(1776~1852)의 유고집
비석군과 지석묘
청풍호 분수
청풍호 수경분수는 제천시가 지난 2000년 4월 청풍호반의 볼거리 제공을 위해 설치하였고
162m높이에 이르는 물줄기를 뽑아 올리고 있으며 반달분수 5조, 하늘분수 5조, 햇살분수 100조, 공압분수 26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
제천 물태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546호
이 불상은 높이가 341cm이고, 전체적인 조각 양식으로 볼 때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모양은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에 인중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어깨까지 드리워 졌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으며, 왼손은 땅을 가르키고 있다.
옷은 통견의(양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 형으로 겹겹이
대좌에까지 내려왔다.
충주댐 건설로 수몰지인 청풍면 읍리에서 1983년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이게 무슨 연고란 말인가!
한벽루에 올라 노랗게 핀 산수유와 하얀 매화에 취해 푸른 청풍호를 바라보다 잠깐이나마 졸아볼 마음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한벽루는 공사 중이네!
한벽루(寒碧樓)
보물 제528호
누정은 한순간의 유희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시대의 지성인들이 자연과 인간의 도를 논하고 희로애락의 심경을 시로 승화하던 문화공간이다.
그래서 누정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구도의 열정이 서려 있고 문물과 제도를 고뇌하는 다스림의 철학이 얽혀 있다.
옳고 그름으로 격돌하고 허탈과 비애로 애 끓이는 현실에서 물러난 여유와 망중한의 음유가 있는 곳이 누정이다.
청풍군수 정수홍이 선배 정치인 하륜에게 자랑삼아 주열의 절창을 읊어 대는 모습을 상상해 보니 마음이 유쾌해진다.
특히 앞의 두 구절이 갖는 음악성이 시 구절을 입에서 맴돌게 하는 묘한 힘을 갖는다.
이 두 구절을 응용한 후대의 선비는 바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다.
寒碧樓高入紫冥 한벽루 높다랗게 자색하늘에 솟았는데
隔溪相對展雲屛 개울 건너 마주하니 구름병풍 펼친 듯
新晴晩倚孤舟望 갓 개인 저녁 외로운 배에 기대어 바라보니
非鏡非煙一抹靑 거울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데 온통 푸르름 덮였네.
— 이황 〈망한벽루〉 《퇴계선생문집》
한벽루는 풍혈의 바람이 차가운 한(寒)자, 수혈의 물은 푸른 벽(碧)자를 취했으며,
익랑을 달아낸 조선시대 대표적인 3대 누각으로 밀양 영남루와 남원 광한루 가운데 가장 간결하고 단아한 외관을 갖추었다.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여 관아에서 세운 독특한 양식의 부속 목조 건물이며
연회장소로 사용 하였던 것으로 주정되며, 고종 7년(1870) 부사 이직현이 중수하였고 1972년 수해로 건물 일부가 유실되어
1976년 다시 복원하였다.
구조는 앞면 4칸, 측면 3칸의 2층 누각과 앞면 3칸, 측면 1칸의 계단식 익랑건물이 이어져 있다.
기둥사이는 모두 개방되었으며 사방에 목재 난간이 있다.
특히 누각에 올라 갈 때 계단 역할을 하는 '익랑'이 있으며 조선시대 3대 익랑 누각(건축물)중 하나로 현존하는 건축물로써
유일한 양깃기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며,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하륜의 기무도 유명하나
1972년 수해 당시 유실된 것을 2001년 복원하였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를 새긴 정면 중앙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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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한벽루는 공사 중이라 볼 수 없어 한벽루 공사장에 붙어있는 사진을 이용한다.
落月微微下遠村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寒鴉飛盡秋江碧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樓中宿客不成眠 누각에 머무는 손 잠 이루지 못하는데
一夜霜風聞落木 온 밤 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네.
二年飄泊干戈際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느라
萬計悠悠頭雪白 온갖 계책 지루하여 머리만 희었네.
衰淚無端數行下 서러운 두어 줄기 눈물 끝없이 흘리며
起向危欄瞻北極 아스라한 난간 기대고 북극만 바라보네.
유성룡 〈숙청풍한벽루〉 《서애선생문집》 제1권
응청각(凝淸閣)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90호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寒碧樓)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황(1501~15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인조 15년(1637)에 충청감사 정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중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복원하였다. 2층누각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목조 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청풍 금병헌(錦屛軒)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이곳은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 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현의 승 정공이 왕사가 되어
군이 되었다. 현종 초에 도호부로 되었으며,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 후 숙종 31년(1705)에 부사 이희조가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필문이 중수하고, 권도인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전면 보수 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하여 1983년에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원정(明月亭)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淸風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금남루(錦南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호
이곳은 청풍부의 아문으로, '도호부절제아문(都護府節制衙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 25ㄴ녀(1825)에 청풍부사 조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직현이, 동 37년(1900)에
부사 현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도 보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에 있었으나, 충주대목적댐의 조성으로
1983년에 이곳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건물이다.
▽
안쪽 현판은 금남루 밖엔 도호부절제아문
망월산성 가는 길
망월산성(望月山城)
충청북도 기념물 제93호
청풍대교 남쪽 망월산(373m)의 정상부와 지맥을 둘러 쌓은 서정지로 둘레가 495m의 작은 성인데
문지는 북쪽 너비 3m의 것이 1개소 있고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서남쪽에 너비 16m의 성벽과 남쪽에 너비 15m, 높이 4.6m의
성벽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토기, 기와조각이 몇 점 수집된 바 있으며, 삼국사기에 신라 문무왕 13년(6730에
사열산성을 더 늘려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 축성 되었으리라 보여진다.
또한 이곳은 문화재단지 입구에서 망월산 정상까지 500m에 위치해 망월산성 주변을 산보하며 주변경관을 조망할 수 있으며
약 30분 정도 소요되는 500m의 산책로가 조성되어 가벼운 등산코스로 최적이며, 정사에는 전망대인 망월루가 있어
청풍호반을 한 눈에 볼수 있는 관광명소이다.
하트(Heart)를 지닌 소나무
관수정
망원산성 올라가는 도중에 있는 정자
망월산성 올라가는 중간 관수정에서 본 청풍문화재단지
한벽루를 복원 공사 중인 푸른 색 건물
국민연금 청풍리조트
조각공원과 청풍호 분수대와 번지점프 등의 위락시설
연리지(連理枝) 소나무
서로 다른 나무의 가지가 이어져 한 몸이 된 것을 연리지(連理枝)라고 한다.
한 나무가 죽어도 다른 나무에서 영양을 공급하여 살아나도록 도와주는 연리지는 예로부터 귀하고 상서로운 것으로 여겼다.
연리지는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하여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비유하며,
자녀의 지극한 효성과 친구의 돈독한 우정,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나무에 소원을 빌면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청풍 문화재 단지는
정부의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으로 충주다목적댐 공사가 1978년 6월부터 시작하여 1985년 10월준공되기까지
수몰지역내의 산재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1만 6천평의 부지위에 원형대로 이전 복원하여 1985년 12월 23일 개장하였다.
청소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매년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으며,
지금은 8만 5천평의 규모로 확대 개발되어 우리시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지로 발돋음하고 있다.
보물 2점(한벽루, 석조여래입상), 지방유형문화재 9점(팔영루, 금남루, 금병헌,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4동), 지석묘, 문인석,
비석등 42점과 생활유물 2천여점이 보관되어 명실상부한 옛 남한강 상류의 화려했던 문화의 산실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 문화재는 직접 생활하거나 사용하던 것으로써 타 지역과 차별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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