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 유적(尤庵 宋時烈 遺跡)
사적 제417호
소재지 :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화양 서원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은거했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 중후기 기호학파의 모임 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중국 명나라 황제[신종(神宗),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 주변에는
송시열의 묘소와 신도비, 암서재, 읍궁암 외에 암서재 주변의 암벽에 충효절의(忠孝節義), 비례부동(非禮不動)
등이 새겨져 있어 반청숭명사상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립이후 조선조 말까지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였던 이 유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되고 파괴당하는 수난을 겪은 곳입니다.
화양계곡 입구
노목들이 줄 지어 있네요.
수량이 많았으면 경치가 더욱 멋졌을 터인데.....
유적지 전경
대원군 이하응도 한때 이곳을 지나다가 얻어 터졌다는 그정도로 위세 좋은 곳이라는데,
한낮인데도 문을 잠궈 들어 갈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외삼문(양추문)과 뒤에 성공문
다른 곳과 달리 지형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유난히 우암송시열 유적지 서원과 만동묘 오르는 계단은 가파르고 좁으며,
도저히 정면으로 가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합족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밟을때 마다 허리를 숙이며 넘어지지 않도록 발을 보며서 걷도록 되어 자연스럽게 예를 갖추게 만들었습니다.
양추문
존사청과 풍천제
증반청
만동묘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숙종 29년(1703)에 세운 사당으로, 두 개의 기둥은 제사나 의식을 행할 때 불을 밝히는 화광대.
명나라 임금의 위패를 조선이 모신 것은,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도움 받은 힘 없는 나라의
아픔을 보는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자주 국방을 못하고 힘 있는 나라에 의존하고 있네요.
만동묘정비각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 :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
이 비는 만동묘를 세우게 된 취지와 제사를 모시고 있는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을 추모하는 뜻을 기록한 것이다.
영조 23년(1747)에 이재가 글을 지어 세웠으며, 순조 14년(1814)에 다시 세웠다.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권상하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숙종 29년(1703)에 세운 사당이다. 초기에는 나라에서 제사 지내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이곳 유생들의
횡포가 심하자 고종 2년(1865)에 나라에서 대보단에 모시고 만동묘를 철폐시켰다.
그 후 유생들의 끈질긴 건의를 받아들여 다시 향사케 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1917년에 제사를 금하게 되었다.
1937년에는 위패와 제사 용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는 비문을 알아보기 힘들게 쪼아버리더니, 1942년에는 묘당등 일체의
건물을 철거하여 괴산 경찰서 등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묘정비는 땅에 묻어버렸다.
1983년에 괴산군에서 묘정비를 찾아 다시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안내문 참조했음)
화양서원(華陽書院)
조선 숙종 22년 (1696) 문정공 좌의정 우암 송시열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된 해에 사액(賜額)을 받고 숙종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으며,
1717년에는 만동묘(萬東廟)가 세워져 노론집권기에 국가로부터 많은 토지와 노비를 받는 등
송시열을 제향한 전국 44개 서원 가운데 위세가 가장 큰 서원이었으나,
제수전(祭需錢)의 명목으로 각 군·현에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송해 강제로 돈을 걷거나, 춘추제향(春秋祭享)을 지낸 뒤
원임(院任)들에게 치번(致膰)을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복주촌(福酒村)과 복주호(福酒戶)를 운영,
요역을 피하려는 부민(富民)으로부터 돈을 받고 피역(避役)시켜 부민이 지던 역을 가난한 백성들이 대신 떠맡게 하는
폐단을 일으키고 횡포가 거듭되자, 1858년(철종 9)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의 주청으로 복주촌을 없애고,
재화 징수도 금지시켰고,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99년 국가지정문화재(사적417호)로 지정되어 복원했습니다.(Daum백과사전)
身是吾身口是吾
신시오신구시오
몸은 바로 나의 몸이고 입도 바로 나의 것이니
動身開口摠由吾
동신개구총유오
몸을 움직이고 입을 여는 것은 모두 나로부터 비롯된다.
如何將此吾身口
여가장차오신구
여하튼 장차 이러한 나의 몸과 입을
忘動輕開反害吾
망동경개반해오
망령되게 움직이고 가볍게 열면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되느니라.
(우암 송시열의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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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239호 우암 송시열(1607∼1689) 의 초상화 조선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으며,
본관은 은진.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화양동주(華陽洞主).
화양서원 묘정비 : 충청북도 기념물 제107호
서원의 건립취지와 서원의 주인, 모시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한 것으로 숙종 42년(1716)에 세웠으나,
서원이 철폐되면서 이 비도 땅속에 묻히게 되었던 것을 광복이후에 다시 찾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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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곡 : 금사담(金沙潭)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 또한 금싸라기 같다며 화양구곡의 백미로 꼽히는 곳으로, 금사담 암벽 위에
암서재(巖棲齋)는 우암의 별장이자 서재로 은퇴 후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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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재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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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서재는 1666년 8월에 신축하였으며, 은퇴 후 화양동에 은거할 때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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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에는 효종이 승하하고 주자의 도가 없어진 것을 한탄하는 송시열의 글씨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 武夷山空)
창오산 구름은 끊어지고, 무이산은 텅 비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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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태조 어필 인본(印本)
충효절의(忠孝節義)
암사재와 금사담의 풍경을 자세히 보기 위해 봄에 찍은 사진을 사용합니다.
채운사 가는 길에 돌아 본 암서재
채운사
송시열(宋時烈)이 효종의 북벌계획에 호응하여 700명의 무사들을 양성하던 곳에
1655년(효종 6) 혜일선사(慧日禪師)가 절을 창건하여 환장사(煥章寺)라 하였습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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