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목포 유달산(儒達山)
언제 : 2015년 9월 5일 토요일
모처럼
멀고도 먼 목포를 왔건만 하늘은 비를 내린다.
해남, 강진 그리고 보길도와 청산도 등 남도 여행길에 여러 번 목포를 지나긴 했으나 정작 유달산을 오른 것은 30년이 넘는
신혼 초 아내랑 광주 지인 결혼식 참석하고 노적봉까지만 오른 탓으로
유달산이 방송에 나오면 언젠가는 올라가리라 작정하고 오늘 목포를 왔는데 비는 내일까지 내린다는데
억수로 내리고 바람까지 분다.
노적봉 유래
해발 60m의 바위로 이루어진 이 봉우리에는 1957년 10월부터 1598년 2월까지
목포에 머물고 계시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슬기가 괴인 곳으로,
충무공께서는 적은 군세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하여 이 봉우리를 짚 마름으로 덮어 군량미를 쌓아 놓은 노적봉처럼
꾸며서 우리의 군사가 많은 것 같이 속여 왜군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어,
이러한 일이 있는 뒤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으로 부르게 되었다네.
노적봉 새천년 종각에서 본 노적봉과 유달산
노적봉
△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을 돌아보고 나오니 비가 더욱 세차다.
시내버스로 목포역까지 이동하여
택시를 타고 노적봉까지 가는데, 택시 기사께서 유달산 명물 여인목을 꼭 보라며 장소까지 가르켜 준다.
▽
노적봉 다산목(多産木)
이 나무는 다산을 이루게 한다는 인근 주민들의 믿음의 대상으로 은밀하게 보존되어 외지인에게는 노출되지 않았으나,
2000년 10월 새천년 시민의 종 종각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외부로 드러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단다.
실제로 이 나무를 쳐다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고 있으며, 그 영향으로 인근지역은 유난히
출산율이 높았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관광객들 사이에는 여자나무(여인목)로 불려지고 있으나 오래전부터 다산목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수종은 팽나무로 150년이 넘은 어미나무의 뿌리에서 싹이 나와 성장하여 현재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흠~ 괴괴하게 생기긴 했네
유달산에서 본 노적봉
△
노적봉을 돌아보고 30년 전 기억을 더듬고
유달산 계단을 오르니 정면에 이순신장군 동상이 목포 앞바다를 내려다 보고
한쪽에 복바위(쥐바위, 탕건바위)가 있다.
▽
목포 시내를 돌아보니 사방은 벌써 어두워지고
비와 바람으로 더 올라가기가 머뭇거려졌으나 목포의 눈물 노래비는 보고 내려가야지.
이난영 선생 '목포의 눈물' 노래비
목포의 눈물은 그냥 들어도 한이 서린데, 빗속에 서서 구성지게 흘러나온 노래를 들으니
비는 내리고 날 저무는데,
갈 곳 없는 길손의 마음 착잡하다.
목포의 눈물은 문일석(작사), 손목인(작곡)으로 1945년에 발표되었다.
1933년『조선일보』신춘문예의 향토가요가사로 당선된 노랫말에 엔가풍(演歌風)으로 작곡되었다.
1.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2.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 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나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작사자와 가창자가 모두 목포출신인 이 곡은 지금도 끊임없이 불리고 있는 곡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 최초의 노래비(碑)인 ‘목포의 눈물’ 이 유달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지나 더 오르니 삼학도가 눈앞에 보인다.
대학루(待鶴樓)
정자에 앉아 있는 노란 비옷을 입은 한 사람 외엔 더는 사람이 없다.
목포항과 구시가지
노적봉과 삼학도
삼학도는 목포시 만호동에 속하는 하중도이다.
지금은 육지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옛날엔 배를 타고 건너가 목포 만호청의 땔나무를 구했던 곳이었다.
1897년 목포항이 일본인에 의해 개항되고 사람이 들어가 살기 시작하였다.
1962년에는 이로면 입암리와의 사이가 매립되어 완전히 섬으로서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이 섬의 모습이 학처럼 보여 '삼학도'라 불렸다고 한다.
노적봉과 뒤로 삼학도를 바라보는 참 전망이 좋은 곳이다.
목포의 오포(午砲)
오포(午砲)는 오정포(午正砲)라고도 하는데
1905년(융희 2년) 4월 1일 당시 일본통감부가 한국과 일본의 시차를 무시하고 오전 11시에 일본 시간 정오 12시에 맞춰
정오로 정하고 포를 쏘아 알린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목포의 오포는 1909년 4월에 개시되었다.
최초의 오포는 조선식 선입포(先入砲 - 화약과 포탄을 앞에서 넣고 심지를 꽂은 다음 불을 붙여 발사하는 식)로
경기도 광주로부터 이송해다가 측후소 바로 위 각국 거류지계 표석 근처에서 일성을 울렸다.
이 포는 조선조 현종 10년 서기 1669년에 제조된 것으로 기록에 의하면 '1회 발사하는데 화약 30량이 소모되며,
발포할 때마다 뒤로 밀려가는 구식이었기 때문에 1913년 8월 일본 오사카 포병공장에서 당시 가격 160원하는 이 포를 구입하여
후에 사이렌이 그 역할을 대신할 때까지 사용했으며, 그 전에 있었던 조선식 대포는 당시 동명동에 있던 송도신사 경내로
옮겼다'고 한다. 일제말기에 일본이 공출로 거둬가 버린 것을 1988년 12월 26일 현재 자리에 복원하였다.
전라남도에서는 1986년 11월 유달산 오포대를 지방 문화재 자료 제138호로 지정하였다.
목포 시내와 다도해
완전히 인적 끊겼으나 더 오른다.
유선각(儒仙閣)
유달산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정자로, 이곳에서는 목포항과 시가지 그리고 삼학도와 다도해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 기념으로 세웠다가 이런저런 일로 1973년 3월 1일 옛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구한말 유학자로 시문에 능했던 무정 정만조(1858~1936)를 비롯한 선비들이 유달산에서 시회를 열고
시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유선각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한다.
누각 현판의 글씨는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1894~1956)선생께서 유달산에 들렀다가 기념으로 남긴 것이라네.
아무도 없는 유선각 앞에는 유선각 시비가 비에 젖고 있다.
유선각 앞에 있는 비(碑)에는
"흰 구름이 쉬어가는 곳입니다. 세 마리의 학이 고이 잠든 푸른 바다의 속삭임을 새벽 별과 함께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라는 문장이 적혀있는데, 목포문화예술발전에 앞장 섰던 故 차재석 선생의 글이다.
△
고래바위(두꺼비 바위)
거대한 고래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란다.
유선각을 떠나 더 오르니 고래바위란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더 세차게 내려 아쉽지만 유달산을 내려가 앞으로 일정을 생각해야 한다.
유달산은 높이는 228m로,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층층기암과 절벽이 많아 호남의 개골(皆骨)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목포 시민의 공원일 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유달산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군량을 쌓아둔 것처럼 가장하여 적을 속인 곳 노적봉이 있으며, 최근 알려져 주목을 받는 여인목과
곳곳에 멋진 정자들이 있어 목포 시내와 삼학도, 다도해를 볼 수 있고,
가수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노래비와 애달픈 노래가 길손을 맞아 주지만,
비는 거세지고 날도 저물어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며, 좋은 날 다시 와 오늘의 비 내린 유달산을 추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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