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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제117호 조선의 법궁(法宮) -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

조선의 법궁(法宮) - 경복궁(景福宮)

 

 

서울을 방문하면 내국인이나 외국인이 가장 먼저 찾아보는 곳이 경복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복궁(景福宮)은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 정궁)으로,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다.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1394년(태조 3년) 한양에 천도,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경복궁에 입궐한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이며,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을 중심으로 남북축선상에 주요건물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면서

정전과 편전은 앞부분에, 침전과 후원은 뒷부분에 배치하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오늘은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공간인 외조(外朝)와 정전 그리고 편전과 침전인

광화문-흥례문-근정문-근정전-사정문-사정전-향오문-걍령전-양의문-교태전과 아미산까지 담는다.

 

 

광화문과 해태상

해태는 한문으로 해치(獬豸)이다.

 시비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이며,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로 여겨져 불의 기운이 강한

관악산 보 악산이 낮아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해태상을 세웠다.

 

 

4대문이나 성문의 누각에 보면 건물에서 흘러떨어지는 물들을 밖으로 빼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져

밖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시설물들이 있는데 이걸 '누혈'이라 하며,

 문 위에 여러 동물들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서수'들이 조각되어 있다.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

 

 

조선의 4대궁의 정문 이름에는 모두 '化'자가 들어가게 문 이름이 지어졌다. '광화문, 돈화문, 인화문, 흥화문' 등으로,

 이때 사용된 '化'자는 임금이 백성들을 위하여 어진 정치를 하라는 의미로 쓰여진 글자라고 한다.

 

 

광화문 현판 글씨

임진왜란 이후 복원할 때인 1865~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세운 광화문 현판 글씨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최근 현판 자료를 수집하던 중 흥미로운 기록을 찾아냈다. 현판을 쓴 이가 학계에 그동안 알려졌던

조선 말 서화가 몽인 정학교(1832~1914)가 아니라 경복궁 훈련대장이던 무관 임태영(?~?)임을 알려주는 공사일지

 (경복궁영건일기)의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19세기 경복궁 중건 때 광화문 현판을 무관 임태영이 썼다고 기록한 <경복궁 영건일기>의 일부분.

줄로 싸인 부분에 ‘광화문 현판 서사관 임태영’이란 글자가 뚜렷이 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영건일지>에는 임태영이 ‘광화문 현판 서사관(書寫官)’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사관이란 글씨를 쓰는 임시직을 뜻한다.

 

 

광화문(光化門)

1395년(태조 4)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으로 명명되었다가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궁궐은 그 용도에 따라 법궁(法宮), 정궁(正宮), 이궁(離宮), 행궁(行宮), 별궁(別宮)으로 나뉘며,

궁궐(宮闕)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자가 살고 있는 궁(宮)과 궁을 지키는 궐(闕)로 이루어져 있다.

궁은 외조와 치조와 연조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고, 궐은 경복궁의 사대문과 궁을 둘러친 담장[宮城]과 망루(望樓)로서의

동십자각(東十字閣)과 西十字閣(서십자각) 그리고 수비 군사들이 기거하는 광화문에서 흥례문 사이의 공간을 말한다.

 

 

 

육조거리에는 경복궁의 정문(正門)인 광화문 앞 왼쪽,

즉 동쪽으로는 의정부(議政府), 이조(吏曹), 한성부(漢城府), 호조(戶曹), 기로소(耆老所), 포도청(捕盜廳)이 차례로 자리잡았고

광화문의 오른쪽, 즉 서쪽으로는 예조(禮曹), 사헌부(司憲府), 병조(兵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등이 차례로 배치되었다.

이들 육조거리의 관아(官衙)를 통칭하여 궐외각사(闕外各司)라고도 불렀다

 

 

 

흥례문

2001년에 복원

 

 

삼문삼조(三門三朝)

중국 궁궐의 구성 방법으로,

삼문이라 함은 고문(皐門), 치문(治門), 노문(路門)이고 삼조라 함은 외조(外朝), 치조(治朝), 연조(燕朝)를 이름한다.

외조는 신하들이 집무하는 공간으로 흥례문에서 근정문까지,

치조는 정전(正殿)과 임금이 일상생활을 하던 편전(便殿)을 포함한 공간으로 근정문에서 향오문(嚮五門)까지,

연조는 임금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침전(寢殿)과 생활공간으로,

향오문 뒤의 임금의 침소인 강령전(康寧殿)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 대비의 생활공간인 자경전(慈慶殿) 일원이다.

따라서 고문은 외조의 정문으로 흥례문이고,

치문은 치조의 정문으로 근정문이고, 노문은 연조의 정문으로 향오문인 것이다.

 

 

 

 

흥례문에서 본 근정문

 

 

 

영제교(永濟橋)

2001년 복원된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그 다리 옆에 천록(하늘에 산다는 사슴) 같은 형상의 동물의 형상이 조각되어 금천을 건너오는 잡귀들을 막고 있다.

 

 

근정문 : 보물 제812호

근정문 좌우의 동쪽의 문신이 드나드는 일화문과 서쪽의 무신이 드나드는 월화문이 보인다.

문관 : 학 흉배

무관 : 호랑이 흉배

 

궁궐의 길은 삼도(三道)로 이루어져 있다.

삼도의 길 중에 가운데가 약간 높이 솟아있는데 이곳을 특히 폐도(陛道)라 하고 임금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이고

동쪽의 길은 문신(文臣)이, 서쪽의 길은 무신(武臣)이 다니는 길이다. 그래서 가운데 길인 폐도는 임금만 다닐 수 있어

폐도를 다니는 사람을 일러 폐하(陛下)라고 부르는데 아쉽게도 황제의 나라인 중국의 황제에게만 그렇게 부를 수 있고

제후의 나라인 조선의 왕에게는 그렇게 부르면 역심을 품은 것이 되었단다.

 

삼도와 마찬가지로 대문(大門)도 동쪽의 문에는 태양을 뜻하는 일(日)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문신(文臣)들이 드나들고,

서쪽의 문에는 달을 뜻하는 월(月)자가 들어가며 이곳으로는 무신(武臣)들이 드나드는데

근정문 동쪽의 일화문(日華門), 서쪽의 월화문(月華門)을 말한다.

 

 

근정전 : 국보 223호

 경복궁의 정궁으로서 조선시대에는 매월 이곳에서 4번의 조회가 있었고,

외국 사신이 왔을 때 환영행사를 하거나 3대 명절(설날, 동지, 왕과 왕비의 생일), 왕이나 세자 즉위식 등

중요한 의전행사를 하던 곳으로,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며 마당에는 박석이 깔려있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답도

근정전 답도에는 봉황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중국 황제는 이곳에 용을 새겨놓았단다..

답도를 그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왕은 이곳 월대까지도 연을 타고 출입하였기 때문에 이 위를 연이 지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근정전 천정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조선은 제후국이어서 오조룡이 새겨져 있었는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칠조룡으로 바꾸어 새겨 놓았다고 한다.

청의 힘이 크게 미치지 못하고 여러 열강들이 세력 각축을 벌일 때 이미 대원군은 조선도 황제국을 꿈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조대비를 위하여 지은 건물인 '자경전' 앞의 문도 만세문이라 하여

'만세'는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당상관은 정삼품 이상의 벼슬인데,

당상관은 임금을 가까이서 알현하여 직접 고할 수 있는 위치의 벼슬이고(단 위에 올라가 아뢸 수 있는 벼슬)

당하관은 직접 임금을 알현하여 고할 수는 없고, 상소 등을 통하여 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정전과 사정전 내부

 

조선시대 때 관료들의 품계에 따라 깔고 앉는 방석도 달랐다고 한다.

표범-호랑이-염소-개가죽 순으로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향오문과 강녕전

 

 

 

강녕전

康寧殿 一廓은 1920년 昌德宮의 復原을 爲해 헐려 없어진 것을 1995年 復原하였다.

 

 

교태전 문인 양의문 밖 우측 굴뚝 千世萬歲(천세만세)

康寧殿은 王이 居處하던 곳인만큼 火災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建物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康寧殿 뒷便의 交泰殿으로 가는

양의문 左右에 벽돌로 아름답게 굴뚝을 붙여 지었다.

양의문 좌측에 있는 강녕전 굴뚝: 萬壽無疆(만수무강) 

 

양의문과 교태전

본래 교태전 건물은 옮겨 1918년 창덕궁 대조전을 건축하였고, 現在의 交泰殿은 最近에 再建하였으나,

굴뚝은 高宗 當時 景福宮 重建 때의 것이다

 

교태전

康寧殿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特徵으로,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이 오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는데, 그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

 

 

교태전 내부

교태전 뒤에는 정원인 峨嵋山이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後面東쪽에 마루와 房으로 連結된 健順閣을 配置하였다.

 

 

 

아미산(峨嵋山)

 

아미산(峨嵋山)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가산(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맥이 북한산, 북악을 지나 경복궁에서 멈춘 장소이다.

 아미산에는 괴석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보물 811호인 아미산 굴뚝이 있다.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혹은 31단으로 쌓고,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아미산 굴뚝 : 보물 제811호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굴뚝이 어디있을 것인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라고 생각한다.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정문이며 남문: 광화문, 동문:건춘문, 서문:영추문, 북문: 신무문)을 두고,

남쪽으로 정전, 편전, 침전과 후원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왕자의 난으로 인한 개성천도 기간 동안 빈 궁궐이었으며, 세종·문종·단종이 이곳에 주로 기거했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에 타

피난길에서 돌아온 선조는 경운궁(덕수궁)에서 머물렀고,

 1865(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어 1868년 고종이 경복궁에 머물렀으나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 이후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겼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들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복원사업을 벌인 덕분에 복원 작업은 현재 부분 완료된 상태다.

 

근정전, 경회루, 향원정, 아미산 굴뚝 등은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