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관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올 여름은 메르스 사태로, DMZ 지뢰폭발 사건등으로 유독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입추가 지났고,
새벽녘 귀뚜리 울음을 들으며 산길을 걷는다.
하늘이 하시는 일 막을 자 없으시다는 구순 노모님 말씀이 더욱 쌉싸름한 여운이 있다.
2015. 07. 07. ~ 08. 30.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구중궁궐 조선 왕비와 후궁에 관한 특별전이 열려 다녀왔다.
지면 제한으로 모두 올릴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국립고궁박물관
오백년 역사를 지켜온 조선의 왕비와 후궁
국립고궁박물관은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 왕실이 장구한 역사를 이어 오는 데 한 축을 담당했던
왕비와 후궁을조명하고자 특별전을 마련했다.
전시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누어 구성되는데, 1부는 왕비와 후궁이 왕실 여성이 되는 과정에서부터 왕실 여성으로서
행해야 할 역할과 임무, 죽은 이후에도 생전의 권위를 유지시켜나가는 상장례와 사당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2부는 왕실 여성의 생활에 초점을 두어 의생활, 문예활동, 불교를 통한 신앙생활, 경제생활 등의 일면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궁중 3대 문학작품의 주인공들을 통해 파란만장한 왕실 여성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지금까지 전시에서 주목받지 못한 왕실 여성의 역할과 위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영친왕비 홍원삼
고종과 순헌황귀비가 낳은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1901~1989)가 착용했던 원삼이다.
홍색 비단에 금실로 구름과 봉황 무늬를 직조했고, 가슴과 등, 양 어깨에는 용무늬 보를 부착했다.
원삼의 안감은 원형의 수(壽)자 무늬의 둘레에 박취무늬가 있는 황색 수복문단을 사용하였다.
의친왕비 녹원삼
고종과 귀인 장씨가 낳은 의친왕의 부인 김씨가 입었던 것으로 길과 소매 부분은 연두색 도류사(桃榴紗)로 만들었고,
소매 끝에는 홍색과 황색의 금선단(金線段)을 연결하여 붙였다.
어깨와 도련에는 수복화문(壽福花紋)을, 한삼에는 수(壽)자 무늬를 금박하였다.
경국대전내명부조
조선 1668년(현종 9)
내명부는 조선 시대에 궁궐에서 거주하던 여관(여관)들의 총칭이다.
내명부는 내관과 궁관으로 구분되었는데, 내관은 왕이나 세자의 후궁들을, 궁관은 상궁과 궁인들을 의미한다.
백자도병풍(百子圖屛風)
조선~대한제국 19세기 말~20세기 초
자손이 번성하고 아이들이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길상화(길상화)로서 혼례식의 의례병풍 또는 부녀자나
아이들의 방에 장식용으로 사용된 병풍이다. 궁중에서는 간택된 여성이; 임시로 머물던 별궁에
백자도병풍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미가례간택단자(丁未嘉禮揀擇單子)
대한제국 1907년(융희 1)
첫쩨 줄에 후보자의 성씨. 나이. 생년월일시. 본관을 적고 그 다음 중부터 4祖(부.조부.증조부.외조부)의 관직과 이름을 적었다.
가장 우측에 보이는 민영돈의 딸이 최종 간택되었지만, 일제에 의해 일본 왕족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다.
순종순명효황후 가례도감의궤
조선 고종 19(1882)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가례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혼례의 전 과정과 절차를 비롯해 가례의 준비와 진행에 대한
모든 사항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삼간택훙예별궁반차도
간택된 왕비 또는 세자빈이 혼례를 위해 별궁으로 이동하는 행렬을 그린 반차도이다. 행렬의 주인공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가례도감의궤에 전하지 않는 왕비나 세자빈의 별궁 이동 행렬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경종비 선의왕후 세자빈 책봉 죽책. 옥인. 교명
조선 숙종 44년(1718)
경종의 계비(선의왕후)를 세자빈으로 책봉하면서 만든 죽책. 옥인. 교명이다. 교명과 죽책에는
세자빈을 향한 교훈과 경계의 글이 담겨 있다.
경종비 선의왕후 왕비 책봉 옥책. 금보. 교명
조선 경종 2년(1722)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를 왕비로 책봉하며 제작한 옥책. 금보. 교명이다. 세자빈 책봉 때 죽책과 옥인을 내린 것과 달리
왕비 책봉 때에는 격을 높여 옥책과 금보를 내렸다.
순종순정효황후가례반차도권
대한제국 1906년(광무 10)
황태자였던 순종과 황태자비 순정효황후(1894~1966)의 혼례 행렬을 그린 반차도이다.
대한제국기에 황실의 격에 맞춰 변화된 가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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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실구봉안현판(産室具奉安懸板)
조선 1773년(영조 49)
산실청에 걸었던 현판으로 산실에 쓰이는 용구를 봉안한다는 뜻의 '産室具奉安"이 양각으로 새겨제 있다.
영조가 80세 되던 해인 1773(영조 490에 직접 쓴 글씨이다.
무진진찬도병(戊辰進饌圖屛) : 신정왕후의 회갑 잔치를 그린 병풍
조선 1868년(고종 5)
1868년 익종비이자 헌종의 어머니인 대비 신정왕후의 탄신 60주년 기념 진찬 광경을 그린 병풍이다.
제 1~2폭의 근정전진하도(勤政殿進賀圖), 3~4폭의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 5~7폭의 강녕전익일회작연도(康寧殿翌日會酌宴圖)
제8폭의 좌목(座目)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진찬은 새로 중건된 경복궁에서 처음 열린 궁중 행사였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으며 익일회작 장면을 세 폭에 할당하여
강녕전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였다.
신정왕후의 회갑에 올린 옥보 : 翼宗妃神貞王后玉寶(익종비신정왕후옥보)
조선 1868년(고종 5)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60세 생일에 맞추어 '숙렬(肅烈)라는 존호를 올릴 때 만들어진 옥보이다.
왕과 왕비에게 존호를 올린 기록
조선 1866년(고종 3)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수렴청정 종료를 경축하기 위해 신정왕후와 익종. 헌종. 철종 및 이들의 비인 효현왕후, 요정왕후,
철인왕후에게 존호를 올린 기록이다.
상존호책보예궐반차도(上尊號冊寶詣闕班次圖)
조선 고종 25년(1888)
문조비 신정왕후, 헌종비 효정왕후,고종비 명성황후에게 각각 '창복(昌福)' '장소(莊昭)' '원성(元聖)' 이라는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기록한 반차도이다.
명성황후서간
명성황후(1851~1895)가 주로 가까운 인척에게 보낸 한글편지로 화려한 색지에 그림을 그리거나 목판에 문양을 새겨
찍었다. 주로 주상 전하와 동궁의 안부를 전하거나, 정치적인 이야기들이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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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부도사리장엄구
고려 말~조선 초 보물 제259호
1439년(세종 21) 정혜옹주(?~1424년)를 위해 금성대군이 시주해 만든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이다.
정혜옹주는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의 딸인데, 세종과 소헌왕후의 아들인 금성대군은 이 의빈 권씨에게서 자랐다.
금성대군은 자신을 키워준 의빈 권씨의 딸 정혜옹주를 위해 사리탑을 세운 것이다. 청자 항아리와 함께
금동9층소탑, 은제도금육각감, 수정사리병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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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도
조선 1562년(명종 17)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나라의 평안과 왕의 무병장수 및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제작한 오백나한도 중
제153나한 덕세위존자를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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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화궁도서인장(順和宮圖書印章)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에서 사용한 인장으로 '순화궁도서'라는 인문이 전서로 새겨져 있다.
경빈은 1874년(헌종 13) 후궁으로 간택되어 순화(純和)라는 궁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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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일기(癸丑日記)
1613년(광해군 5)에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모후인 인목왕후를 서궁(西宮)에 유폐시킨 사건 등이 인목왕후 편의 시각에서
서술된 작품이다. 조선 궁중문확을 대표하는 세 작품 「계축일기」「인현왕후전」「한중록」가운데 창작 시기가
가장 빠른 작품이다. 이본으로 낙선재본과 한글본 「서궁일기」가 있는데, 낙선재본은 행방을 알 수 없고 「조선역대여류 문학」에
영인되어 전해지고 있다.
계축일기와 서궁일기는 작품의 내용과 서술 시점이 거의 같다. 작자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인목왕후의 측근 나인,
혹은 인목왕후나 정명 공주일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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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
숙종 대에 있었던 인현왕후의 폐위와 복위 사건에 대한 과정을 작품화한 소설이다. 당시 궁중풍속과 생활의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일종의 교훈서로 널리 읽혀졌다. 원전(原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16종의 이본(異本)이 전해지는데,
구활자본 1종을 제외하면 모두 한글 필사본(筆寫本)이다. 필사본의 제목은 「민중전덕행록(閔中殿德行錄)」「인현성모민씨덕행록」
「인현왕후성덕현행록」「민중전전」 등 다양하다. 제작 시기는 인현왕후의 승하 직후나 그 후대로 추측 되며, 작자는 인현왕후를
모셨던 궁인, 그리고 서인(西人) 측 사람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중록(閑中錄)
1795년(정조 19) 회갑을 맞은 혜경궁 홍씨가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쓰기 시작하여 1795ㄴ녀, 1802년, 1805년, 1806년에
저술했던 여러 편의 글을 몪은 것이다. 저술 배경과 동기에 따라 크게 3부로 나뉜다.
「한중록」「한중만록」「읍혈록」「보장」등 다양한데 후대 독자나 필사자가 그들이 느낀 감상을 제목으로 붙인 것이다.
한글본, 한문번역본, 한글, 한문혼용본으로 전해지며, 글의 체계나 내용도 이본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읍혈록(泣血錄)
혜경궁 홍씨(1735~1815)가 쓴 회고록인 통칭「한중록」의 이본 중 하나로, 읍혈록이란 '피눈물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한중만록(閒中慢錄)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인 통칭 「한중록」의 20여종의 이본 중 하나로, 한글 필사본이며 「고종실록」에는 한중록이
읍혈록과 한중만록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와 동일한 명칭의 필사본이다.
혜경궁 홍씨 한시
혜경궁 홍씨가 희수(喜壽)인 77세에 지은 친필 칠언절구 한시로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시의 처음과 끝에 희수 낙관과 '혜경궁'이라고 명시된 낙관이 각각 찍혀 있다.
고인수공일준개 : 고인(사도세자)은 지금 누구와 한통 술을 마시는가
왕사기성고침몽 : 지날 일은 이미 외로운 베개 밑에 꿈이 되었네
사설기류군자이 : 사악한 이야기는 어찌 군자의 귀에 머물겠는가
한수난근달인미 : 한가한 시름은 달인의 눈썹에 미치기 어려워라
조선의 왕비와 후궁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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