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4호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석조전
언제 :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석조전은
1910년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으로 건립되었으나 정작 정전으로는 사용되지 못하고,
용도가 변경되어 사용되면서 내부가 많이 훼손되었는데, 2009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14년 10월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을 개관하여
인터넷 예약에 한해 제한 인원과 제한 시간으로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지난 7월 23일 덕수궁 방문 때 석조전을 볼 수 없어 매우 아쉬웠는데,
인터넷으로 석조전 관람 예약일이 확정되어 8월 7일 13시 무지하게 찌던 날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관람하였다.
석조전 완공 직후 모습
그러나 고종은 덕수궁 홤녕전에서 생활하고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만 석조전을 사용하였고,
순헌황귀비는 준공 이듬해 1911년 홍거하여 석조전을 사용하지 못했다. 석조전은 공식 행사나 행사 후 만찬 장소로
주로 사용되었고, 영친왕이 국내 귀국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다. 이후 고종이 승하한 후 덕수궁이 방치되면서
석조전도 사용되지 못하다가 일제에 의해 용도 변경되었다.
석조전 중앙 상단에는 대한제국 황실문양인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보인다.
13:00
석조전 입실하면서 예약 여부를 확인 후
신발 대신 슬리퍼를 신고 안내원 설명과 함께 제한된 시간 내에 허락된 내부만의 석조전 관람이 시작되었다.
석조전 내부는고증자료의 검증을 거쳐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였고,
각 방은 사진이 남아있는 공간은 생활사를 재현하였고, 고증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공간은 대한제국 전시실을 꾸몄다.
생활사를 재현한 가구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창덕궁에 남아 있던 가구를 준공 당시 위치에 배치했으며
부족한 가구는 석조전 준공 당시 영국 메일플사(Maplle&co.) 가구였기에 메이플사 카탈로그를 참조하여
유사한 영국 고가구를 구매 혹은 복제하여 배치하였다
중앙홀
석조전의 로비와 같은 공간으로 정면은 접견실과 측면은 귀빈 대기실과 대식당이 연결되어 있다.
중앙홀을 비롯한 석조전의 각 방은 고증 자료의 검증을 거쳐 준공 당시의 실내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탁자는 석조전 준공 당시 가구이다.
▽
△
중앙홀 우측 모습으로 정면의 탁자는 석조전 준공 당시의 가구이다.
중앙홀 좌측 모습으로 피아노가 놓여있다.
중앙홀에서 본 2층과 천장 모습
내부가 하두 화려하여 기둥의 상단과 천정을 둘러가며 장식된 것을 담았다.
귀빈 대기실
황제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공간으로 대기 중에는 관리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거나 황실에서 제공하는 비스킷, 삼페인 등의
서양식 다과를 즐겼다. 장식장과 긴의자에는 'RECEPTION ROOM'이라는 문구가 있다.
석조전 1/100 모형
석조전 건립
대한제국 최대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은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로,
영국인 브라운이 계획을 세우고,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궁의 정전으로 계획되었던 석조전은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준공되었다.
지층은 창고와 주방등의 준비실로 구성되었고,
1층은 집무 및 접견을 위한 공간, 2층은 황제와 황후의 생활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전통적인 궁궐은 편전(便殿)과 침전(寢殿)이 별도의 건물로 분리되어 있는데,
석조전은 이를 한 공간에 둔 서양식 궁전이다.
△
측면에서 본 석조전과 후면에서 본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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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
1897년 10월 12일,
국내 외의 혼란 속에서 고종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강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체제를 갖추고자 황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에서 황제에 등극하였다.
새 국호는 고대의 삼한을 통합한다는 의미에서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광무(光武)'라는 새 연호를 사용하였다.
또한 황제의 지위에 걸맞은 복식과 제도를 정비하여 황제국의 위엄을 드러내었다.
대한제국의 선포 배경
1895년 고종의 비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 공권력 집단에 의하여 시해되었다.
이 사건은 을미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을미사변'이라고 일컫는다. 이후 신변의 불안함을 느낀 고종이
1896년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을 가게 되었다[아관파천(俄館播遷)]
이듬해 경운궁(덕수궁)으로 들어가 1897년 9월 17일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1897년 10월 12일 황제에 등극하여 중국과의 관계에서 주종관계를 극복하고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자주적인 독립국으로 면모를 갖추었다.
고종은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였고, '광무(光武)'라는 새 연호를 사용 1907년 8월까지 10년간 존속되었으나,
1907년 8월 고종의 강제폐위 및 순종의 즉위로 연호가 광무에서 융희(隆熙)로 바뀌었다.
황제국의 면모를 갖춘 대한제국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왕에서 황제로 등극한 고종(광무황제)은 복식과 국새를 새롭게 정하였고,
국경일도 공포하였다.
조선의 왕이 입는 평상복 홍룡포는 황금색 황룡포로 바꾸었고, 국가를 상징하는 국새(도장)는 조선왕보(朝鮮王寶)에서
대한국새(大韓國璽)로 변경하였다.
또한 황실의 인물을 책봉하거나 공덕을 칭송할 때에는 '옥책(玉冊)'을 대신하여 '금책(金冊)'을 사용하였다.
또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날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과 황제의 생일 '만수성절(萬壽聖節)'등 여러 국경일을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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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 폐현 의례
이 방은 석조전 준공 당시 식당이었으나, 현존하는 고증 자료의 부족으로 식당 복원 대신 대한제국의 의례를 설명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의 격에 맞추어 조선왕조의 여러 의례를 크게 고쳤다. 또한 새로운 국제질서에 맞는
서양식 의례를 도입함으로써 외교 의례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가운데 고종(광무황제), 왼쪽은 이범진 프랑스 주재 대한제국 공사, 오른쪽은 민영환 원수부총장(육군중장)의 복장이다
접견실
황제를 폐현하는 방으로 서양식으로 꾸몄다. 석조전의 다른 방들과 달리 황실의 문장인 이화문(李花文 오얏꽃무늬)을
가구와 인테리어에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황제 접견실까지 관람하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인데 카페트가 매우 폭신하여 기분이 참 좋았다.
1층에서 계단을 통해 2층의 모습
대한제국 황실 가계
20세기 전후로 사진기가 유입되면서 대한제국 황실 가족을 촬영한 사진이 다수 남아 있다.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과 순종은 전통 복식인 곤룡포를 착용하기도 했고, 서양식 군복을 입거나 훈장을 달고 촬영하였다.
이 방부터 서쪽으로 이어진 방은 본래 여관(女官)이 사용하였던 1호실, 2호실, 3호실로 알려져 있으며, 내부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대한제국 황실 인물에 대한 전시실로 활용하였다.
명성황후 사진이 없는 까닭은 아직까지 명성황후의 실제 모습의 사진을 찾지 못했단다.
덕혜옹주가 귀국하여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 1962년 1월
황제 침실
이 방은 고종(광무황제)의 침실로 계획되었으나, 고종은 함녕전에 머물면서 사용하지 않았고, 1907년 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던 영친왕이 1911년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홍거시 귀국하여 임시 거처로 사용,
영친왕은 이후 1922년 귀국할 때마다 임시 숙소로 사용하였다.
가구에는 'EMPEROR'S BEDROOM'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공간은 황금색으로 재현하였다.
황제의 욕실과 화장실
그 시절에 좌변기와 대리석 세면대가 설치되었네!
황제의 서재
서재 우측에 놓인 회전하는 사각 책장(앞쪽)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회전이 잘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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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거실
황후가 책을 보거나 내빈을접대하는 방으로 다른 방들에 비해 가구가 화려하다. 가구에는 'EMPRESS'S BOUDOIR'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BOUDOIR(부드와르)는 전통적 개념의 안방, 규방과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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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의 공간은 자주색으로 재현하였다
황후 침실
이 방은 순헌황귀비(영친왕의 생모)의 침실로 계획되었으나 석조전 준공 직후 1911년 황비가 별세하여 사용하지 못하였고,
영친왕과 혼인한 이방자 여사가 영친왕과 입국했을 때 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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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욕실과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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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공간의 전경
석조전 2층 테라스에서 본 풍경
1938년 6월 서관의 개관 후 9월에 현재 석조전 앞 물개 모양 분수대의 모습
2층 테라스에서 멀리 등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황제가 손을 흔들어 보이듯 흉내를 내다.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낳았고, 둘째 아들이 순종이 된다.
명성황후 이후 고종은 순헌황귀비를 맞아 영친왕을 낳았다.
영친왕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이다. 1920년 일본 왕족의 딸 마사코(이방자)와 혼례를 올려 일본에서 머물다가
1962년 국적을 되찾고 1963년 이방자여사와 귀국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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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즉위 40주년을기념하여 건립한 칭경기념비와 비각 (사진은 2012년 11월에 담은 사진)
100여 년 전,
덕수궁 주변에는 여러 주요 기관이 밀집되어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각국 공사관이
덕수궁(당시 경운궁) 인근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이와 연계하여 외국인들이 설립한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의 교육 기관,
정동교회(미국), 성공회교회(영국), 러시아정교회(러시아) 등 각국 종교 기관이 세워졌고, 외국인을 위한
호텔도 생겨나게 되었다.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올린 환구단과
고종의 즉위 40주년을기념하여 건립한 칭경기념비와 비각 등 덕수궁 주변에는 각종 관공서
그리고 외교 시설까지 밀접해 있는 대한 제국의 정치와 외교의 중심지였다.
다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가 대식당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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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식당
공식적인 행사 후 만찬을 베푼 공간이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연회에서 서양식 요리가 제공되었는데,
석조전에서도 서양식 만찬을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생전 처음으로 덕수궁 석조전 내부를 살펴보았다.
대한제국 황궁의 정전이었으면서도 아픈 상처가 많은 석조전은 우리의 유일한 서양식 궁전이었기에 푹푹 찌는 더위에도
늘 궁금했던 석조전 내부를 관람할 수 있어서 기분 좋다.
그러나
제한된 인원과 제한된 시간 내에 안내자에 의해 석조전에 관한 설명과 내부를 살펴본다는 일은 쉽지 않았고,
사진 촬영을 할 만한 여유도 없었으나 다행히 설명을 들으면서도 사진도 담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조급하게 모든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느긋하게 돌아보며 생각할 수 있는 관람이 되면 대한제국과 석조전을 이해하는데 더욱 좋겠다는 생각으로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서관)
이제는 석조전 서관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관람하였으나, 이곳은 촬영이 불가되어 사진을 담을 수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광복 70년을 기념하여,
해방기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과 예술가의 사명을 붓으로 끌어안았던 화가 이쾌대를 조명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쾌대가 남긴 그림은 대략 1930년에서 1950년 무렵까지 20여년에 걸쳐 제작 되었다.
이쾌대는 1905년 6·25전쟁 직후,
서울에 급조되었던 남침 북한 체제의 남조선미술동맹에 적극 가담한 후 인민 의용군으로 참전하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 수용소에서 휴전을 맞이하였지만 남북 포로 교환때 자의로 북한을 택하여 넘어갔다.
자화상
여인들
작가 이쾌대에 대해 설명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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