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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제122호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후원 연경당(演慶堂)과 궐내각사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演慶堂)과 궐내각사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부터 옥류천까지 돌아보고 다시 낮은 산을 오르고 내려

 보물 제1770호 연경당에 당도한다.

연경당은 후원의 주합루(宙合樓)·영화당(暎花堂) 일곽을 지나 애련정 애련지(愛蓮池), 의두합 등이 조성되어 있는 곳

 안쪽 아늑한 골짜기에 있다. 

‘연경(演慶)’은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으로,

『궁궐지』에는 순조 28년에 총 120칸으로 건립하였다고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순조 27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햇볕은 나지 않지만, 후덥지근한 날씨에 옥류천을 나와 연경당에 당도하니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려준다.

 

 

 

 

 

 

 

 

 

 

 

 장락문(長樂門)

 연경당 정문도 장락문이고, 낙선재 정문도 장락문이네.

장락(長樂) :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

 

 

 

장락문을 들어서면

중문(中門)이 있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출입문이 있다.

 

 

 

장양문(長陽門)

중문으로 사랑채로 통하는 문으로, 陽은 남성 혹은 하늘 등을 나타낸다.

 

 

창덕궁 연경당 배치도

 

연경당(演慶堂)

2012.8.16. 보물 제1770호로 지정된 연경당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예에 따라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 겹으로 두르고, 중문(中門)이 있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와 안채로 통하는 출입문을 좌우로 벌려 냈다.

유교의 내외법(內外法)에 따르면 남녀의 공간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과 출입문을 설치하는데,

연경당에서는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은 사잇담을 설치하여 구분하고 있지만,

건물은 붙여 지어 사랑채 내부에서 안채 내부로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사랑채 안 동쪽에는 누마루를 두었고, 그 동쪽 마당에 선향재(善香齋)라는 서실(書室)을 배치하였으며, 선향재 후원에

 높다란 화계(花階)를 쌓아 정원을 만들고 그 위쪽 언덕에 농수정 정자가 있다.

 

 

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안내원께서 사랑채인 연경당 앞에서 연경당과 선향재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사랑채인 연경당에서 내당(안채)까지 이어진 방

 

 

 

측면에서 본 연경당

 

 

 

선향재(善香齋)

사랑채의 왼쪽에 있는 서재겸 응접실로 청나라풍의 벽돌을 사용하였고, 동판을 씌운 지붕에 도르레식 차양을 설치하여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측면에서 본 선향재 

 

  

 

농수정(濃繡亭)

 

 

로왤이 농수정 장대석 위에 선 고종을 촬영한 사진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재위 1863~1907)은 유일하게 얼굴이 알려진 왕이다.

그의 치세에 사진술이 도입돼 어진과 함께 어사진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사진을 찍은 건 언제, 어떤 계기일까. 누가 그의 사진을 찍었고,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고종이 처음 사진을 찍은 건 윤치호의 일기에는 “1884년 3월10일과 13일 사진을 촬영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고종의 사진을 처음 찍은 건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남긴 미국인 퍼시벌 로웰로, 그는 애리조나 천문대를 세운

유명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으로, 조선이 1883년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했을 때 안내를 맡았던 인물로,

고종은 그 공을 치하하는 의미로 한국에 초청해 1883년 12월20일부터 이듬해 3월18일까지 체류했다.

1884년 3월10일, 그는 윤치호의 소개로 창덕궁에 들어가 농수정을 배경으로 고종 사진 3장과 왕세자(순종) 사진 1장을 찍었다.

고종은 장대석에 서거나 앉아서 사진을 찍었고, 원경도 촬영했다. 빛의 상태로 보아서 시간은 오후 1~2시로 추정된다.

고종의 첫 사진촬영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 <고종, 어사진을 통해 세계를 꿈꾸다>에서

 

 

사랑채에서 본 안채와의 경계 담과 문

 

 

 

연경당은 효명세자가 순조와 순원왕후를위한 잔치를 베풀고자 1827~8년(순조 27~8)에 지은 효심이 담긴 집이다.

창건 직후 연경당에서는 효명세자가 신하를 접견하거나 진작례를 거행하였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철종 8년(1857)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겼고,

고종 대에 이르러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연회를 베푸는 등 중요한 정치 공간으로 이용하였다.

 

 

구름은 끼어 햇볕은 가리웠지만 후덥지근하여 땀을 훔치면서도 오르고 내리며,

많은 분이 창덕궁 후원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연경당을 나와 오르고 내리며 돈화문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긴다.

 

 

 

 

 

 

왼쪽 건물은 궐내각사

 

 

 

창덕궁 향나무 : 천녕기념물 제194호

이 향나무는 나이가 약 750년 된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5.6m, 뿌리부분둘레 5.9m이다.

향나무의 목재는 강한 향기를 지니고 있어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사용된다. 이곳에 향나무가 심겨진 것은 동쪽에 있는

선원전이 역대 임금들을 휘한제례의 공간인 곳과 관련이 있다.

1830년 무렵에 그려진 창덕궁 그림(동궐도,東闕圖)에서도 이 향나무를 찾아 볼 수 있 듯,

긴 세월이 묻은 창덕궁의 터줏대감이다.

 

 

 

 

 

 

 

 

 

규장각

원래 규장각은 후원 주합루 2층이었으나,

너무 후미지고 불편하여 정조 5년(1781)에 궐내각사로 옮겼다.

 

 

 

 

 

 

금천이 흘러 돈화문 금천교를 지나며,

이곳을 경계로 좌측은 선원전 일원이며 우측은 규장각 일원으로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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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전

 

 

선원전에서 본 창덕궁 정전과 양지당

왼쪽 건물은 선원전 오른편에 있는 내찰당이며, 정면 작은 문은 재실인 양지당으로 들어가는 문 

 

 

억석루는 담장과 출입문으로 선원전과 구분하고 있다.

억석루에는 역대 국왕이 적은 현판을 보관하는 장소로 한옥이지만 중국풍의 건물형태를 하고 있다.

 

 창덕궁 후원을 돌아보는데 정해진 시간 내에 마쳐야 하기에

비록 우거진 숲길과 연못과 아름다운 정자를 보면서 다녀도 날이 후덥지근하여 땀이 비 오듯 내렸다.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까지 모두 둘러본 후,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일원으로 가서 궐내각사를 돌아보며

 국내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