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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제122호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낙선재

 사적 제122호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낙선재 - 보물 제1764호

 

 

 

임금이 머물던 곳이지만, 궁궐같지 않게 소박하고 검소하며 구석구석 아름다움이 베인 곳.

 

조선 24대 헌종이 1847~1848년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낙선재 권역은

보물 제1764호인 낙선재와 동쪽의 석복헌, 그 옆의 수강재 등 총 9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근년에는

영친왕과 그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 고종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문화재청이 창덕궁 낙선재 권역을 외국인을 위한 고가의 숙박시설로 개방하는 ‘궁(宮) 스테이’를 추진한다는데,

문화재청은 7월 15일 낙선재 권역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두 전각을 고급 호텔 스위트룸처럼 꾸며 외국인 관광객이

숙박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며 하루 숙박료는 최소 300만원으로 잡고 있다고 밝혔다.

 

요즘 하두 웃기는 소재가 많기는 하지만,

궁궐 일부를 고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꾸며 외국인에게 고가의 숙박료를 받는다기에

여러번 찾아본 낙선재이지만,

 더운 날 일부러 낙선재를 찾아보았더니, 과연 문화재청에서 낙선재 일원에 대한 무슨 검사를 한다며

많은 사람이 건물들을 검사하고 있었다.

 

 

 

 

 

낙선재 전경

낙선재가 쇠잔해 가는 조선왕조 최후의 무대라는 감회를 느끼게 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돌이켜보면 일찍이 황태자였던 영왕 이은 이 1907년 12월 어느날 ,

이 곳 낙선재 뜰에서 놀고 있다가 느닷없이 11세의 어린 몸으로 통감 이토히로부미에게 이끌려 일본으로 납치되어

끝내 볼모 신세가 되었고,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된 순종 황제가 1926년 4월 25일에 43세를 일기로 대조전 흥복헌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 이후,

순정효황후, 세칭 윤 비도 장장 43년이라는 긴세월을 홀로 낙선재에서 그 비운을 달랬다.

 

윤비는 1906년 13세에 동궁(순종)의 계빈이 되어 다음 해에 융희 황제(순종)의 황후가 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 늑약이 강요되던 흥복헌 어전회의 때 옥새를 치마 속에 움켜 쥐고 통곡하다가 숙부 윤덕영에게 강탈당하는

통분을 격기도 했으며,

 6.25동란 때는 공산당에 의하여 낙선재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말년에 이르러 대지월이라는 불교의 법명을 얻어 나라의 비운과 자신의 고독을 달래다가 , 1966년 2월 3일 낙선재에서

73세로 영욕의 일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영왕 이은도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곧바로 환국하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 가까스로 귀국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말을 못하는 기억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의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5월 1일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11세에 일본으로 납치되어

1920년 4월 28일 일본의 4대 귀족의 하나인 나시모토 미야케의 19세 난 규수(후에 이방자로 개명)와 결혼 했지만 ,

8.15종전으로 일본의 황족도 아니고 한국 국적도 갖지 못한 신세가 되어 20년 가까이 도쿄에서 생활하다가 볼모로 끌려간지

무려 57년 만에 식물인간이 되어 환국한 것이었다.

함께 돌아온 여왕비 이방자여사도 그 후 낙선재 생활 27년, 향년 88세를 일기로 1989년 4월 30일에 역시 이 곳에서 운명하였다.

 

이방자여사는 자신의 저서 <비련의 황태자비>에서 영왕과의 결혼 사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는 1916년 8월 , 볼모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와 있던 영왕의 약혼녀로 정해졌다.

나와 이은 전하는 단순한 한일 민족융화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권력 투쟁의 음모 속에서 희생된 것이다."

이방자 여사는 결혼 다음 해인 1921년 8월 첫아들 진을 안고 첫서울 나들이를 하였는데 사흘째 되던날

갑자기 진이 폐렴으로 세상을 떴다.

 

고종 황제의 고명딸인 덕혜옹주도 정신질환상태에서 독감으로 1989년 4월 21일에 낙선재에서 한 맺힌 생애를 마쳤다.

덕혜옹주는 1912년 복녕당 양씨의 몸에서 태어난 마지막 옹주로서,

1918년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시종이던 김황진의 조카와 약혼까지 맺었지만 별 수 없이 일본으로 업혀가고 말았다.

어머니인 양 귀인의 무릎에 싸여 어리광을 부리던 어린아이었지만 , 일본인들이 옹주마저 볼모로 데려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부랴부랴 늘상 가까이 있는 시종의 조카와 약혼을 맺어 놓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 아버지 고종황제의 근심어린 배려도 헛되이 1919년 고종께서 운명하시자마자

일본인들은 다음해에

10세 난 옹주를 납치하여 우리나라의 지위를 낮춰 버릴 셈으로 일개 대마도도주의 아들과 강제 결혼을 시켰다.

대마도주 아들과의 동거 생활 3년 만에

덕혜옹주는 그 동안의 시련으로 인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쳐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처럼 낙선재는 조선왕조 최후의 왕손들이 슬프고도 기구한 운명을 마감한 무대였다고 할 수 있는 곳을

 "궁 스테이"로 꾸며 외국인에게 고가로 개방한단다.

자자손손 물려주어야 할 국민의 문화재를

 외국인을 위해 우리 국민은 어떤 식으로든 통제를 받게 되는 또다른 희극을 빚게 된다.

 

 삼량정

낙선재 뒤 언덕에 삼량정이 보이지만, 개방되지 않아 멀리서 봐야 한다.

 

 

 

낙선재 일원에 대한 정밀실측조사

외국인을 위한 숙박시설을 마련코자 낙선재 일원에 대한 정밀실측조사를 한다는 공사 안내문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

흥선대원군의 글씨

 

 

낙선재에서 본 삼량정

 

 

 

낙선재 - 보물 제 1764호

 

 

 

추사 김정희와 교분이 있던 청나라 금석학자 섭지선(葉志詵)이 낙선재 현판을 썼다.

 

 

 

조선 헌종이 1847~1848년 지은

창덕궁 낙선재 권역은 보물 제1764호인 낙선재와 동쪽의 석복헌, 그 옆의 수강재 등 총 9개 건물로 구성됐다.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 고종황제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살던 곳이다.

 

 

낙선재 내부

 

 

 

낙선재 정문인 장락문과 행랑채

앞에 보이는 숲은 종묘로 옛날에는 종묘와 낙선재가 오갈 수 있게 다리가 놓였는데 철거되었다.

 

 

낙선재 후원의 화계(花階)

화계는 수목을 심은 층계 형태의 단을 의미하는데, 낙선재가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낙선재 후원의 화계

 

 

 

 

 

낙선재와 석복헌의 사잇문

 

 

 

낙선제에서 석복헌으로 가는 도중

 

 

 

외부에서 보이는 석복헌 입구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가는 길에 좌측의 석복헌 입구와 정면의 수강재 입구가 보인다.

석복헌은 문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다.

 

 

내부의 석복헌 입구

 

 

 

석복헌(錫福軒)

경빈의 처소로 궁궐에 비할 수 없지만, 구석구석 헌종이 경빈을 위해 쏟은 사랑이 베어있는 둣하다.

또한 석복헌은

조선의 마지막 순종효황후가 1966년 2월 3일,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한 곳이다.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머물렀던 석복헌 난간에는 다산을 기원하는 호리병 장식이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조선 제24대 헌종(1827~1849)은 그토록 사랑했던 경빈과 자식도 두지 못하고 23세 청춘에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의 재위기간 15년(1834~1849)은 생의 절반을 왕위에 있어 결코 짧지 않다.

아버지 효명세자가 22세(1809~1830)에 세상을 떴기에 조선 왕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인 8세에 왕위에 올라,

 할머니 순원왕후(23대 순조의 비)가 어린 헌종을 대신 7년간 수렴청정을 했고, 15세에 왕권을 부여받았으나,

새롭게 불어오는 외국문화로 인한 국정혼란을 다스리지 못해 역사가들은 무능한 군주로 평가한다.

 

그러나 오늘은 헌종과 경빈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얘기하고자 한다.

헌종에겐 사랑이 늦게 찾아왔다. 첫 번째 부인인 효헌왕후 김씨가 16살에 세상을 뜨자 이듬해 새 왕비 간택에 참석한 헌종은

 삼간택(세 명 후보에서 택하는 것)에 남은 세 여인 중 경빈이 마음에 들었지만,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명헌왕후 홍씨를 간택했다.

 

헌종은 경빈을 잊지 못하고, 

3년 뒤 명헌왕후 홍씨가 젊었음에도 후사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이때 헌종은 21세 경빈은 17세.

 그렇게 어렵게 찾은 사랑도 불과 2년만에 끝이 났다.

낙선재와 석복헌에서 경빈과 애틋한 사랑에도 후사를 두지 못하고 헌종이 23세에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낙선재와 석복헌은 헌종이 경빈에 대한 소박한 사랑이 구석구석 베어있음을 볼 수 있다.

결국 왕위는 제25대 강화도령인 철종으로, 다시 고종으로 이어지는 조선말이었다.

 

 

석복헌 내부

오밀조밀 방들이 많음은 헌종이 경빈을 사랑했던 마음인 듯 하다.

 

 

석복헌과 수강재는 이렇게 마루로 통하게 되어있다.

 

 

 

한정당(閒靜堂)

당호는 '한가롭고 조용하게 지내는 집'을 의미하며,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석복헌 후원의 화계 위에 있다.

 

 

석복헌과 수강재 사잇문

 

 

 

석복헌에서 본 수강재

 

 

 

수강재

수강재는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종이 상왕이 되어 머물기 위해 지었는데, 폐위된 단종이 잠시 생활하기도 했다.

헌종은 할머니 순원왕후를 위해 수강재를 중수했다.

또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머물렀던 곳이다.

 

 

수강재에서 본 석복헌 방향

 

 

취운정(翠雲亭)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은 개방돼 있지 않아서 멀리서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수강재 후원의 화계 위에 있다.

 

 

낙선재는 본래 창경궁 권역에 속해 있었으나 이 담은 덕혜옹주가 생활하면서 세워졌다.

당시 창경원에 놀러온 사람들이 수강재 근처까지 와서 소란을 피우자 경계를 가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통해야 낙선재에 갈 수 있다.

 

창경궁에서 본 낙선대와 경계의 담

 

문화재청은 보물로 지정된 낙선재는 개방하지 않지만 석복헌과 수강재는 숙박시설로 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사람 살던 궁궐을 일반에 개방해 숨결을 불어넣고 문화재를 제대로 활용하자는 취지”라며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면 극히 일부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우선 외국 외교사절, 기업 최고경영자(CEO) 등에게 개방하자는 것으로

회전율을 높일 수 있는 가격대를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왜 꼭 최고급 숙박시설이어야 하는지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황평우 은평한옥문화박물관장은

 “모든 계층이 공평하게 활용할 수 없을 게 뻔한데 돈 벌기 위해 문화재를 활용하자는 것인지 의문스럽다”며

 “한국의 정체성을 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고가 숙박시설을 만드는 것이 궁궐 문화재를 활용하는 최선이냐에 대한 이견도 있다.

홍순민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궁궐에서 실제 살았던 시대를 체험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반 소비재인 고급 호텔처럼 활용하는 것은 일종의 ‘쇼’라고 본다”

고 말했다.

 

창경궁에서 본 낙선재 취운당과 한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