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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제122호 창덕궁 대조전 일원과 성정각 일원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대조전 일원과 성정각 일원

 

 

 

여름의 한복판. 창덕궁의 하늘은 한없이 파랗고,

그동안 중동호흡기증후군으로 인해 발길이 끊겼던 외국인들도 제법 보인다.

 

오늘은

창덕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대조전 일원과 성정각 일원 그리고 동궁의 거처인 중회당 일원을 담는다.

 

특히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은 한·일병합조약의 전권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위임하는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린 곳으로,

 흥복헌 입구 병풍 뒤에서 숨죽이고 지켜보던 순종의 왕비 순종효황후가

이완용에게 넘겨줘야 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빼앗겨

통곡하던 장소이며, 순종이 세상을 하직한 장소이다.

 

 

 

 

 

 

 

 

 

대조전에서 본 대조전 입구인 선평문

 

 

 

대조전 : 보물 제816호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 동쪽엔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운의 장소인 흥복헌이 있다.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을 헐어 가져와 1920년 완공했다.

 

 

대조전 내부

 

 

 

흥복헌

1905년 11월 덕수궁 증명전에서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이미 조선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상태에서,

고종은 일제에 의해 퇴위를 강요당하여, 1907년 7월 순종이 황제에 오르고, 즉위하자마자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겨져,

왕비인 순종효황후 처소인 대조전에 유패된 채 억압된 생활을 하게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즉위한 지 4년째인 융희(隆熙) 4년.

 

 경술년 여름 막바지 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1910년 8월22일 오후 2시 서울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興福軒)에서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다.

회의 안건은 단 하나, 한·일병합조약의 전권을 내 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순종과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이재곤, 궁내대신 민병석,

시종원경 윤덕영 등 각료들과 왕족 대표 이재면, 원로 대표인 중추원 의장 김윤식 등이 참석했다.

이완용이 5년 전 1905년 을사늑약 당시의 ‘활약’에 이어 다시 한 번 나선다.

합방의 필요성과 불가피성, 그동안 일본과 교섭한 내용 등을 한 시간 가까이 설명했고, 이미 닷새 전 이완용이 손을 써 놓았던

 나머지 각료들은 모두 마지못해 “옳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순종은 이완용의 발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3시가 조금 넘어갔다. 마침내 순종은

 “권신이 모두 가(可)하다면 짐도 이의가 없다. 동양평화를 위해 기쁜 일이다.”며 조약에 관한 전권을 이완용에게 위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러한 마지막 어전회의를 흥복헌 입구 병풍 뒤에서 숨 죽이고 지켜보던 순종의 왕비 순종효황후는

이완용에게 넘겨줘야 할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빼앗겨 통곡하는 상황에서 회의는 끝났다.

 

이완용은 위임장을 들고 지체 없이 농상공부대신 조중응과 함께 마차에 올라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있는

 통감관저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의 명의로 데라우치와 함께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함께 샴페인을 마시며 자축했다.

숱한 외적의 침입과 전란 속에서도 지켜온 나라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1910년 8월22일 월요일 오후 5시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1910년 8월29일 일본의 강제 병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어 조선왕조 519년이 종말을 고하고,

1926년 4월 마지막 황제 순종은 망국의 공간인 흥복헌에서 세상을 하직한다.

 

 

 

 매국의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제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에는 제법 많은 외국인이 안내하는 분의 설명을 듣는다.

대조전 후원으로 이동한다.

 

 

대조전 후원

대조전 후원으로 이 문을 열면 창덕궁 후원에 닿는다.

 

 

 

대조전 후원

 

 

 

 

 

대조전 후원을 지나 성정각 일원으로 옮긴다.

 

 

 

희정당 일원에서 성정각 일원으로 통하는 동인문

 

 

 

 

 

왕세자의 거처 동궁인 중회당의 터

지금은 왼쪽은 창덕궁 후원으로 가는 길과 우측의 문은 창경궁으로 가는 길이다.

 

 

칠분서와 삼삼와 그리고 승화루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에는

왕세자의 거처인 중희당(重熙堂) 즉 동궁이 있었으나, 지금은 청덕궁 후원으로 가는 길과 창경궁으로 가는

길이 놓여 있고,

중회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세자의 서적을 보관했던 칠분서(七分序)와 삼삼와(三三窩) 그리고 승화루(承華樓)가 남아있다.

 

 

승화루(承華樓)

 

 

 

성정각 일원

 

 

 

성정각

성정각은 세자의 공부방이었으며, 그 옆에 직각의 보춘정 날개채가 참 아름답다.

 

 

 

남향에는 보춘정, 동향에는 희우루 현판이 붙어있다.

 

 

 

성정각과 희우루

 

 

 

관물헌(觀物軒)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를 하거나 접견을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있다.

원래는 스물여섯칸의 큰집이었으며, 갑신정변 때 김옥균 일파가 고종을 옹위하고 청나라와 맞서던 곳이다.

 

 

 

성정각 남향에는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調和御藥)이란 현판이 걸린 작은 건물이 있는데,

이는 임금의 몸을 보호하고, 임금의 약을 잘 짓는다는 뜻이다.

 

 

 

용마루가 없는 대조전 지붕과 희정당 지붕을 성정각에서 바라본다.

 

다음에는

요즘 낙선재 일원인 석복헌과 수강재를 고급 호텔 스위트룸으로 꾸며 외국인에게 고가의 숙박료를 받겠다며

정밀조사를 하고 있는 낙선재 일원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