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사적 125호 종묘(宗廟)
언제 : 2015년 7월 9일 목요일
남부지방에는 장마라는데
중부지방은 오늘이 올해 들어 가장 무더운 날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일들이 순조롭지 않을 땐 배낭을 메고 어딘가 훌쩍 떠나보는 일도 좋은데,
7월은 고궁과 종묘를 비롯한 왕릉이 그동안 메르스 사태로 고생했다며 무료 개방되고 있어 종묘를 다녀왔다.
그러나
매주 토요일은 시간제한도 없고 안내원과 관리원의 감시도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데,
평일에는 일정 인원과 일정 시간 내에 안내원의 유도와 관리원의 감시로
시작부터 끝까지 자유스럽지 않게 관람을 하니 구차하였다.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국가 최고의 사당이다.
종묘의 건물은 1394년 10월 태조가 서울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궁궐의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단을 두어야 한다.'는 고대 중국의 도성 계획 원칙을 따라 경복궁의 왼쪽인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 왕조가 이어져 봉안해야 할 신위가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 건물의 규모가 커져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면 궁궐에서 삼년상을 치른 후에 그 신주를 종묘로 옮겨 모신다.
정전에는 공덕이 뛰어난 임금들을 모셨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와 죽은 뒤에 왕으로 추존되었거나 정전에서 신주를
옮겨온 임금들을 모셨다. 정전의 신실 19칸에는 태조를 비롯한 왕과 왕비의 신위 49위를, 영녕전의 신실 16칸에는 신위 34위를
모셔 두었다.
왕위에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종묘제례는 국가의 가장 큰 제사로서 정전에서 1년에 5번, 영녕전에서는 1년에 2번 열렸으며, 왕이 친히 주관했다.
종묘제례에는 왕세자와 문무백관이 참여하였으며, 음악(樂), 노래(歌), 춤(舞)이 일체화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진행했다.
현재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행하고 있다. 제사 외에도 종묘에서는 국가의 중요한 일을 알리거나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종묘의 모든 건물은 장식과 기교를 배제하여 단순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단순함 속에서
삶과 죽음의 깊은 의미를, 엄숙함 속에서 왕조의 신성한 권위를 읽을 수 있다. 중국이나 베트남과 달리,
한국의 종묘는 건축물과 더불어 제례와 제례악의 본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여 실현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신로(神路)
왕릉에서는 신도라고 표시하는데, 종묘에는 신로라고 표시되었다.
길에 깔린 돌은 박석이라고 한다.
가운데 길은 혼령이 신향로(神香路), 오른쪽 길은 임금이 걷는 어로(御路), 왼쪽은 세자가 걷는 세자로(世子路)
왜 종묘에 고려의 왕인 공민왕 신당이 있을까?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 하였다.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아마도
조선 건국이 역성혁명이 아닌 정통성을 부여받은 건국이라는 점을 피력하기 위함이 아닐까?
역성혁명(易姓革命)
왕조에는 세습되는 통치자의 성(姓)이 있으므로 새 왕조를 세움으로써 통치자의 성이 바뀌게 되는 일.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 의식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으로, 기악. 노래. 춤이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악기 연주에 맞추어 선왕의 공덕을 기리는 노래를 부르며, 열을 맞추어 추는 일무를 춘다.
종묘제례악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에 종묘제례와 더불어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제례
종묘제례악 연주
팔일무
악공
재궁
어재실 : 임금이 제례 준비를 하던 곳
용교의 : 임금님이 사용하시던 옥외용 의자로서 접어서 운반할 수 있도록 간편하게 만들었다.
△
전사청은 안내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았다.
신문(神門) - 남문
정전 일곽은 네모나게 담으로 둘러싸여있고, 묘정(廟庭)을 중심으로 남쪽 담 중앙에는 신문이,
동서쪽으로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과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 있다.
월대와 신로
신문을 들어서면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진다. 묘정 월대는 단의 일종으로, 지면에서 단을 높여
다른 공간과 성격을 달리하며 천상으로 이어지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하월대는 제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대기하는 공간으로 헌가가 자리 잡고 일무를 추며, 상월대는 등가가 자리잡는 공간이다.
그리고 묘정 월대의 한가운데로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길게 나 있다.
정전(正殿) : 국보 제227호
상월대 위에 설치된 기단에는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서 있는데, 현재의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감실 19칸,
그 좌우의 협실 각 2칸,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남으로 직각으로 꺾여나온 동ㆍ서 월랑 5칸이 자리하고 있다.
묘정 월대 남쪽 아래 동서쪽에는 공신당과 칠사당이 각각 서 있고,
서북쪽 뒤에는 제향 후 축과 폐를 불사르는 예감(망료위라고도 함)이 있으며, 동문 북쪽으로 수복방이,
둘레담 밖 서북쪽으로는 전사청과 제정이 있다. 그리고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이 있고,
정전 서북쪽으로는 영녕전 일곽이 있다.
공신당(功臣堂)
역대 임금들을 보좌한 공신들의 사당으로서 총 16칸 규모이며, 안에는 모두 83위의 공신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칠사당
칠사당은 일곱의 작은 신들에게 왕실과 궁궐의 모든 일과 만백성의 생활이 아무 탈 없이 잘 풀리도록 기원하는 사당이다.
칠사는'봄의 사명(司命)과 사호(司戶), 여름의 사조(司窕)와 중류(中霤), 가을의 국문(國門)과 공려(公厲),
겨울의 국행(國行)'을 이르는 말이다.
칠사에게 지내는 제사는 토속 신앙과 유교 사상이 결합된 국가 의례였다.
판위(版位) : 왕과 세자가 제례를 할 때 잠시 멈추어 예를 갖추는 자로로 왕이 멈추는 자리는 전하판위,
세자가 멈추는 자리는 세자판위라고 한다.
남문은 신문으로,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으로 입장하여 정전을 본다.
동문에서 정전으로 오르는 계단
퇴간의 기둥
월대 아래 잔디밭에는 햇빛을 막거나,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차양을 칠 수 있도록 고리가 있다.
정전의 담
정전을 벗어나 양녕전으로 가는 길
양녕전 정문
양녕전 정문의 기둥 무늬가 인상적이다.
영녕전 : 보물 제821호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다.
지금의 종묘는 태조 4년 건립되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된다.
세종 원년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나라에서 따로 별묘인 사조전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영녕전을 건립하게 된 근거이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은 "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무더운 날씨임에도 안내하시는 분께서 열심으로 종묘에 대해 설명을 하신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듣기는 잘 들었는데,
몇 걸음 걸으면 모두 잊어버려 아~ 이렇게 서서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1393년 음력 2월 15일 고려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朝鮮)으로 고치고,
1394년 음력 1월에는 당시 남경이라 불리던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하여 조선의 역사는 시작된다.
1897년 고종은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선포함으로써 조선이란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대한제국도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후에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전환하게 된다.
세계 어디에도 같은 성씨가 500년이 넘도록 왕조를 꾸린 나라는 없을 듯싶고, 왕들의 신위를 모시고 제례를 올리는 곳
또한 없을 듯싶다.
분명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의 유산이다.
그러나
안내원의 설명이 끝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면
그곳에 근무하시는 분께서는 마치 토끼몰이 하듯 더 머물지 못하게 다음 행선지로 몰아가는 것은 정말 기분 좋지 않았으나,
종묘 방침이 그러하다면 따라야 옳다.
처음 시작할 때 화장실을 다녀와야 하고,
양녕전까지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이 끝나고 출구로 가는 길에 화장실을 갈 수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근무자는 화장실에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출구까지 토끼몰이하였다.
꼭 이렇게 토끼몰이를 해야 한다면,
강제로 몰아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좀더 유연한 토끼몰이를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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