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2호
국내 궁궐 중 유일한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언제 : 2015년 7월 17일 금요일
지난 7월 7일 창경궁을 시작으로 7월 9일은 종묘를 다녀와
오늘은 우리나라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창덕궁을 다녀왔다.
3일에 걸쳐 사진을 담았기에
어떤 날은 구름 있었으나 후덥지근한 날이었고, 어떤 날은 햇볕 따갑지만 바람이 불어 하늘 쾌청한 날도 있었다.
여행을 떠나려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으로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문화재청은
7월 한 달 동안 경복궁·창덕궁(후원 제외)·창경궁·덕수궁 등 4대 궁과 종묘, 조선왕릉을 내·외국인 관람객에게 무료로 개방했다.
7월 9일까지만 해도 외국인 방문객의 발길이 끊겨 안타까웠는데,
중순이 지나며 차츰 외국인도 많이 볼 수 있어 다행이다.
창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을 이용한 공간 배치이다.
정문인 돈화문에 서면 경복궁이나 창경궁, 경희궁과 달리 정문에서 정전을 볼 수 없다. 건물들이 일직선으로 배치하지 않고
자연 지형과 공간의 크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형태로 세워져 있다.
창덕궁은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창덕궁은 국내 궁궐 중 유일하게
1997년 12월 6일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敦化門 ) : 보물 제383호
창덕궁 정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의 다포식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1412년(태종 12)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창덕궁이 복구되면서 문도 함께 세워졌다.
△
금천교 : 보물 제1759호
금천교는 창덕궁의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되어 있다.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하였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 3월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되었는데,
그 후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여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인정문과 숙정문 그리고 외행각
인정문 : 보물 제813호
창덕궁 인정문(昌德宮仁政門)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는 출입문으로, 선왕이 승하하면 인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리지 않고,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창덕궁 인정전(昌德宮仁政殿) : 국보 제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이 외국의 사신을 접견하고 신하들로부터 조하를 받는 등, 공식적인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이다.
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었으나 임진왜란, 화재 등으로 철종 7년 해체·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며,
인정전 앞뜰의 품계석은 정조 6년에 설치된 것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기단 중앙의 계단 가운데 판석(板石)에는 구름 사이로 두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궁실(宮室)의 격식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곳은 임금의 길이며, 임금은 걷지 않고 가마를 탔기에 양쪽에 가마꾼이 오르는 계단이 있다.
또한
인정전 용마루에 보면 5개의 꽃모양이 있는데, 다른 궁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대한제국 황실 문양인 오얏꽃(조선 왕조의 성씨가 "오얏 리")으로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창덕궁에 기거한 이후 장식되었단다.
중층건물이지만 내부는 하나로 터져 고주 위로는 대량을 걸고 고주 밖으로는 퇴량을 걸어 사방에 툇간을 만들었으며,
대량의 위치에 우물천장을 드리웠다. 천장 중앙에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넣었다.
고주 : 대청마루의 한가운데에 다른 기둥보다 높게 세운 기둥
그 뒤에는 <오봉산일월도 五峰山日月圖>의 병풍을 쳤다. 어좌 위에는 천장에서 달아낸 보개천장을 두었다.
인정전은 한말에 내부시설 일부를 개조하고 전등을 가설하였다. 내부 바닥은
본래 전(磚)이 깔려 있었던 것을 서양식의 쪽나무로 바꾸고, 창도 내부에 서양식의 들어서 여는 창을 내고 커튼을 드리웠다.
또한, 궁내에 전기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어 여러 개의 전등을 가설하였으며,
이들 새로운 시설은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장식하였다.
인정전 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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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인정전에서 바라본 인정문과 멀리 남산 타워도 조망되고, 아래 사진 우측은 현대사옥으로
저 건물 6층에서 근무했었는데......
▽
품계석
정조 때 세운 품계석으로,
동쪽에는 문관, 서쪽에는 무관이 정렬했으며, 이를 동반과 서반이라고 하며 동반과 서반을 합쳐
우리가 알고 있는 양반이다.
인정전 좌·우로는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창덕궁 인정전 전경
선정전 ; 보물 제814호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지붕이며, 선정문까지 긴 복도각이 특징이다.
선정전(宣政殿)은 어진 정치를 배푼다는 뜻으로, 평상시 임금이 고위직 신하와 일상업무를 논하던 편전으로, 임진왜란과
인조반정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47년(인조 25)에 재건하였다.
선정전 내부
정전 :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
편전 : 왕의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
선정문에서 선정전까지 복도각이 특징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입구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한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었다.
희정당(熙政堂) : 보물 제815호
원래 창덕궁의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 편전으로 사용.
여러차례 재건, 소실되면서 규모와 용도가 바뀌었으며,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양식 탁자를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꾸며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金圭鎭)의 <금강산도>·<해금강도>가 있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
희정당 내부
좌측 건물은 희정당 후면, 우측은 대조전 입구 선평문
▽
지금의 돈화문 밖 모습은 옛모습과 많이 다르다
지금은 도로에서 곧바로 돈화문을 들어갈 수 있지만, 옛날에는 돈화문 앞 도로에서 월대를 거쳐
돈화문을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사진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 때
창덕궁과 종묘사이 도로를 내면서 도로 포장으로 높아졌고, 해방이후 지금까지 도로가 거듭 포장되면서 월대가
마치 땅에 파묻힌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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