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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제123호 창경궁

 

사적 제123호 창경궁

 

 

 

언제 : 2015년 7월 7일 화요일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이때 동향으로 세워졌던 명정전(明政殿)을 남향으로 고쳐야 한다는 김일손의 상소가 있었으나

도감(都監)에서는 만약 남향으로 할 경우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종묘의 내청룡으로 이어지는 맥이 함춘원(含春苑)의 남쪽

지맥을 끊게 된다면서 그대로 둘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창경궁 보유 문화재현황

 

국보 제226호 명정전

보물 7점

제384호 홍화문,  제385호 명정문 및 행각,  제386호 옥천교,  제818호 통명전,  제846호 풍기대

제851호 관천대,  제1119호 팔각칠층석탑

등록문화재 제83호 대온실

 

 

 

 

 

 

 

 

 

 

홍화문(보물 384호)

홍화문(弘化門)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으로 동향이며,

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서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대한민국 보물 제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1484년에 세웠으나 임진왜란때 불탄것을 1616년에 다시 지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왕이 백성을 만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영조는 홍화문 앞에서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백성에게 직접 물었고, 효심 깊은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주며 기쁨을 함께했다.

 

 

명정문에서 바라홍화문과 옥천교

 

 

 

옥천교(玉川橋, 보물 386호)

창경궁 금천 위에 놓은 다리로, 대한민국 보물 제38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모든 궁궐 마당에는 시냇물이 흐른다.

법전이 있는 궁궐의 안족과 외부의 공간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궁궐 뒤의 산과 짝을 이루어 좋은 운을 불러들이는

길지가 되라고 궁궐 앞쪽에 일부러 낸 물길이다. 이를 '금천'이라 부른다.

창경궁의 금천은 옥천이라 부른다. 그래서 이 옥천에 놓인 다리가 '옥천교'이다.

 

 

명정문(보물 385호)

명정문(明政門)은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의 출입문으로, 명정문은 흥화문과 같이 동향을 하였는데,

명정전으로 이어지는 동서 중심축 선상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m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행각으로 둘러싸인 명정전 앞뜰은 반듯한 사각형이 아니라,

약간 기울어진 모습을 하고 있다. 행각은 2칸 폭의 복랑이며, 경복궁의 행랑에 비해 높이가 낮다.

 

 

 

 

 

 

 

 

 

명전전(국보 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대한민국 국보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은 성종 15년(1484년)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중건한 건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2단의 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지어, 중층인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정전보다 격식이 낮다.

 특이한 점으로는 건물 뒤쪽에 퇴칸 형식의 월랑을 두고 있으며, 건물 내부의 앞쪽으로 고주를 세우고 뒷부분 기둥은 모두 생략하였고,

정면 양 협칸의 벽면 하부를 전복돌로 쌓아 점을 들 수 있다.

명정전은 뒤쪽 터가 높게 경사져 있어, 뒤를 제외한 세 면에만 경사지에 맞추어 월대를 조성하였고,

좌향도 지세에 흐름을 맞추었기 때문에 정문인 명정문의 중심과 축이 일치하지 않는다.

 

 

명정전 일월오봉도

 

 

 

 

 

 

 

명전전에서 바라본 명전문

 

 

 

 

 

 

 

 

 

문정전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곳이다.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명정전의 오른쪽인 남쪽으로 명정전과 직교하며 서 있다.

 여기서 사도세자의 임오화변이 시작되었으며, 실제로 죽은 곳은 선인문 쪽이라 한다.

원래 12칸이었으나 복원 때 9칸으로 복원하였다. 동궐도에서 보면 문정전 주변에 회랑이 쳐져있다.

 

 

문정전 내부

 

 

 

 

 

 

정전인 명전전과 문정전을 연결하는 통로로

비를 피할 수 있게 복도 형식을 만들었는데 기와지붕이 인상적이다.

 

 

빈양문

내전과 외전의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문으로,

빈양문을 통과하면 왕의 일반 생활 공간이기 때문에 왕의 가족이나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고는 출입이 엄하게 통제되었다.

현재 빈양문은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던 것을 1984년 발굴, 1986년 복원한 것이다.

 

 

빈양문에서 바라본 창덕궁 담벽과 건물

 

 

 

 

 

 

 

 

 

숭문당

숭문당(崇文堂)은 명정전의 후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1830년에 다시 세웠다.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왕이 태학생들을 접견하여 주연을 베풀었던 곳이다.

앞쪽에 설치한 누각형 툇마루로 출입하였고, 영조 임금의 친필 현판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영조 친필 - 숭문당 현판

 

 

 

함인정

원래 연산군때 지은 인양전이 있던 터이나 임진왜란때 타버렸는데,

인조가 인조반정후 인왕산밑에 인경궁에서 헐어다가 옮겨지었다.

함인정 부근은 마당이 넓어 임금이 신하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으며, 원래 함인정은 전면 열린공간이 아니었다.

3면은 막힌 공간이었고, 함인정과 환경전 사이에 공묵합이라는 전각이 있었으나 소실되어서 현재는 없다.

 

 

회화나무

홍화문을 들어서 외행각 좌측으로 나서면 넓은 정원에 있는데 한자로는 느티나무와 같이 괴목으로 불렸고,

동궐도(東闕圖, 국보제249호)에도 보이는 나무이다.

 

회화나무 근처에 있는 선인문은

폭군 연산군이 왕위에서 쫓겨난 문이며, 선인문 추녀 끝 뒤주에서 사도세자가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는 곳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많이 발생한 선인문과 역사를 같이 한 나무이다.

 

선인문과 회화나무

 

 

 

 

 

관천대(보물 851호)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천문 관측대. 첨성대(瞻星臺)라고도 한다.

높이는 2.2m이고,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대 위에는 99cm의 받침대가 놓여 천문 관측기구를 설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창덕궁 금호문 밖에 세워졌으나, 일제 강점기에 이전되었다가 현재의 자리에 옮겨졌다.

관천대 위에는 별을 관측하는 기구인 소간의(小簡儀)가 놓였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빈양문 밖으로는 사진의 주목들과 창덕궁 담이 있고, 창경궁 내전의 전각들이 전개된다.

 숭문당의 서북쪽 함인정 그 좌우로는 담이 둘러져 있었다는데, 지금은 없다.

 이 담 뒤편으로 환경전·경춘전 등의 침전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내전의 정전인 통명전이 있다. 환경전에서 통명전으로 이르는 일대는 왕과 왕비가 기거하던 곳으로,

다른 공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격식이 높게 잘 다듬어져 있다.

 

다음에는 내전과 후원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