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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123호 창경궁 내전과 후원

 

사적 123호 창경궁 내전과 후원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급속히 변형되기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에 결정적으로 훼손되었다.

1909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 순종 황제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로 강제로 창경궁 내부 궁문, 담장, 많은 전각들을 훼손하고

궁 안에 일본식 건물을 세우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유원지로 조성하였다.

 

권농장 자리에는 연못을 파서 춘당지라 불렀으며, 연못가에 정자를 짓고 궁원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그 뒤쪽에는 식물관을 짓고, 동쪽에는 배양당을 지었으며, 통명전 뒤 언덕에는 일본식 건물을 세워 박물관 본관으로 삼았다.

또한 일제는 남아있는 건물들도 개조하여 박물관의 진열실로 만들었다. 1911년에는 자경전터에 2층 규모의 박물관을 세우고

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하였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내어 주변 환경을 파괴하였다.

1915년에는 문정전 남서쪽 언덕 위에 장서각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벚꽃을 수천 그루 심어 벚꽃숲을 만드는가 하면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어렸을 적 가장 즐길거리가 많은 곳이 창경원이었다.

창경원에는 동물원과 식물원 그리고 춘당지에서는 뱃놀이도 할 수 있었고, 식사도 할 수 있는 멋진 팔각 건물이 있었으며,

춘당지 위로는 케이블카가 운행되었다.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80년까지 서울의 명소였기에 학창시절과 직장생활 중에도 자주 나들이 했었다.

이런 아픈 역사가 있었음을 알지 못하고.....

 

 

 

창경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동·식물원으로 쓰이다가

1981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이 결정되면서 원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83년 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되었으며, 이듬해인 1984년 1월

수정궁의 철거를 시작으로 6월에는 동물 사육장을 폐쇄한 뒤 서울대공원으로 이관하였다.

1986년 8월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없어졌던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 23일 일반에 공개하였다.

1992년에는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이 철거되었다.

 

 

 

 

 

 

 

경춘전과 환경전

경춘전은 원래 대비전으로 쓰인 건물로, 인수대비와 혜경궁 홍씨가 거쳐하던 곳이기도 하다.

정조, 헌종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인수대비와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가 승하한 곳이다.

환경전 또한 침전임에도 불구하고 용마루가 있다. 또한 중종이 환경전에서 훙서하였다.

2012년 환경전은 보수 공사를 했다.

 

 

 

 

순조의 친필 - 경춘전

 

 

경춘전 굴뚝과 창덕궁 건물

 

 

 

 

 

 

 

 

영춘헌

정조의 집무실이었으며, 이곳에서 승하했다.

 

 

 

집복헌

영춘헌과 맞닿아 있으며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모후인 수빈박씨의 거처인곳으로 추정된다.

 

 

 

 

 

 

 

 

 

 

 

양화당

양화당(養和堂)은 왕비의 생활 공간으로 1484년(성종 15년)에 지었으나,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병자호란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 1830년(순조 30년) 또다시 불에 탄 것을

1843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으며, 1878년(고종 15년) 철종의 아내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양화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이다.

현판은 순조의 글씨이다.

 

 

통명전(보물 818호)

통명전은 창경궁에 있는 왕과 왕비의 침전 겸 연회용 건물이다.

 명정전 서북쪽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았는데, 동쪽에 있는 환경전과 함께 남향하고 있다. 창경궁 창건 때인

  1484년에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1616년에 재건하였으나, 다시 정조 14년(1790년)에 불에 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1834년) 창경궁의 전각 대부분을 재건할 때 지은 것으로,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데,

 정면 5칸, 측면 2칸을 감싸며 퇴칸이 설치된 형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창덕궁 대조전과 같이 용마루가 없다.

동궐도에는 이 건물이 터만 남은것으로 보아 순조33년 이전에 불탄것으로 보이며

숙종때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모해하기위해 통명전 뜰에다가 저주하는 물건을 심어다놓았다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통명전 내부가 공개되어 날이 더우니 많은 분이 통명전 마루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도 더위를 식혔다.

 

 

통명전 서쪽에는 동그란 샘에서 물이 나와 네모진 연못으로 흘러

아름다운 정원을 이루고 있다.

 

 

 

 

 

 

 

 

 

통명전 뒤로는 언덕으로 그곳에서 창경궁을 내려다 보며, 서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창경궁 풍기대(보물 846호)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기상 관측기구이다.

18세기 유물로 추정하며, 탁자 모양의 돌 위에 긴 팔각기둥을 세우고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앙부일구 (보물 845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복제품)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처음 만들어진 천문의기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던 해시계의 일종이다.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청동의 오목판 안바닥에는 일곱 개의 세로줄이 그려져 있는데, 이를 시각선이라고 한다.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면서

생기는 그림자가 이 시각선에 비쳐지면서 시간을 알 수 있다.

바닥에는 시각선 이외에 열세 개의 가로줄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24절기를 나타낸다. 제일 바깥 줄은 동지의 해그림자가

따라가는 줄이며, 제일 안쪽 줄은 하지선이다.

 

 

 

성종태실 및 태실비

태실은 왕족의 태반을 묻어 기념했던 조형물이며 태실비는 그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태실은 전국의 풍수가 좋은 명당에 흩어져 있었고, 성종의 태실은 경기도 광주에 있었는데, 일제가 1928년 즈음에

조선 왕실의 태실 대부분을 서삼릉으로 모으는 과정에서 가장 형태가 온전한 성종태실만

이곳으로 옮겨 연구용으로 삼았다고 한다.

 

 

 

 

 

 

 

 

 

 

 

대춘당지

 

 

소춘당지

 

 

 

창경궁 팔각칠층석탑(보물 제1119호)

이 탑은 조선 성종 원년(1470)에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창경궁에 이왕가 박물관을

건립할 때 상인으로 부터 구입하여 세운 것이다.

석탑의 기단은 사각형의 받침돌과 팔각의 2중 기단으로 되어 있다. 그 위에 놓인 팔각형 돌의 각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다.

팔가의 납작한 돌 위에는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둥그스름한 탑신 받침을 놓고 화려한 연꽃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1층 탑신은 위층에 비해 매우 높으며, 지붕들은 팔각으로 목조 건물의 지붕처럼 표현하였다. 지붕돌 윗부분은 그 재질로 보아

후대에 보완한 것 같다. 이 석탑의 전체적인 형태로 보아 공주 마곡사 석탑과 비교되는 라마탑을 연상케 된다.

 

 

 

대온실

 

 

 

울릉도 매발톱나무

 

 

 

장수매

 

 

 

꽃댕강나무

 

 

 

해오라비난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