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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제124호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의 현장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의 현장 덕수궁(德壽宮)

 

 

 

언제 : 2015년 7월 23일 목요일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일제는 고종황제를 덕수궁 전하로, 순종황제를 창덕궁 전하로 부르며 격을 낮추었다.

 

지난 7월 23일과 27일

대한제국과 고종의 아픈 역사의 현장인 덕수궁을 오랜만에 찾아 사진을 담았다.

 

덕수궁은

1970년대 이전 학생들이 가볼 만한 곳이 별로 없었기에

봄이면 모란꽃을 보기 위해, 서클활동 하면서는 다른 고궁에 비해 교통편이 좋아 자주 모여 이런저런 추억이 곳곳에 베인

곳인데, 이젠 주변 고층건물 직장인의 점심 휴식처인 듯하여 아쉬운 곳이다.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이 처음 궁궐로 사용된 것은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찮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로 삼으면서부터이다.

이후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을 경운궁이라 불렀고

 

조선말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다시 궁궐로 사용되었다.

고종 당시의 궁궐은 현재 정동과 시청 앞 광장 일대를 아우르는 지금의 3배 규모였으며, 고종이 일제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고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고종에게 장수를 비는 뜻으로

 '덕수' 라는 궁호를 올린 것이 궁궐의 이름이 되어 덕수궁이 되었다.

 

 

대한문

정오즈음 대한문에 도착하니 거리의 아줌마 밴드라는 3명의 악사가 대한문 앞에서 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다.

대한문은 덕수궁의 어엿한 궁궐의 정문이면서도 주변의 고층건물과 도로확장으로 인해

너무 구석진 곳에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대화재로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70년 고등학생 때,

지금보다 시청 광장으로 나와 있던 대한문인데 도로확장 공사로 대한문과 덕수궁 담이 지금처럼 옮겨져 궁궐의 폭이 좁아졌고,

요즘은 주변 직장인의 점심시간 휴식처로 전락한 느낌이다.

▽ 

 

 

 

 

 

 

 

금천교

정릉동천의 지류인 덕수궁 금천의 흐름을 약간 바꾸어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 이전의 중화전

 

 

 

 

중화문과 중화전

 보물 제819호

 

 

중화전

위의 사진과 같이 1904년 대화재 이전에는 중화전이 중층이었으나, 1906년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건축되었다

 

 

 

왕권의 상징인 일월오봉도와 천장의 용

용과 봉황은 군왕을 상징해 천계(天界)의 존엄과 평안, 장생 등을 기원하였는데

두 상징에서 서열을 매긴다면 용이 먼저이고 다음이 봉황으로 용은 천자 곧 황제(皇帝)의 상징으로 삼았고

 봉황은 천자에게 사대하는  제후(諸侯)나 왕의 상징으로 쓰였다.

 

중국의 황제를 섬기던

조선시대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던 궁궐 정전의 천장에 용을 그리지 못하고 봉황을 그렸었는데

 조선 말기인 1897년10월 12일 고종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고종황제가 된 이후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

천장의 봉황 그림은 황제의 상징인 용 그림으로 바뀌었다.

 

 

중화전 옆의 말채나무

6월에 흰꽃이 피며, 열매가 9~10월에 검게 익는 정원수로 덕지덕지 붙은 껍질이 덕수궁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중화전에서 바라 본 중화문

중화문 앞에 원래의 덕수궁 정문인 인화문이 있었다는데, 흔적도 없어 안타깝다.

 

 

 

 

덕수궁 석어당 보수공사

공사기간 : 2015.3.23~2015. 9.6

노후 및 훼손된 지붕기와 해체 후 부식된 목부재 교체, 이완 및 파손된 창호 보수로 인해 사진을 담을 수 없었다.

 

 

석어당

1593년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가 선왕들을 회상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의 유폐처가 되기도 했으며,

선조가 승하한 곳이다.

궁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2층 건물로 1층 마루 안쪽을 들여다 보면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보인다.
목조 건물 특유의 소박함과 다정함이 일품인 현재의 석어당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중건한 것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것이 특징이다

 

2011년 5월 모란꽃과 함께 측면에서 본 석어당

 

 

석어당 : 고종의 친필

우측 상단에 어필이라고 쓰여있다.

 

 

 

준명당과 즉조당

즉조당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준명당과 즉조당

 

 

즉조당 현판

고종의 친필로 우측에 어필이라고 씌여있다.

 

 

준명당은 한때 덕혜옹주의 유치원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고종이 60세에 얻은 덕혜옹주가 행여 준명당 난간에서 떨어질세라 돌 위 곳곳에 방어 말뚝을 박았던 흔적이 있다.

 

 

유현문(惟賢門)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에서 준명당으로 가는 길에 세워진 문으로,

'어진 사람이 다니는 문' 의미이며, 언제부턴가 이 문을 지나면 '머리가 좋아진다' 하여 학생들이 관심을 갖는 곳이다.

고종이 60세에 얻은 덕혜옹주가 함녕전에서 유치원인 준명당으로 오가는 길에 반드시 지나게 했던 문이다.

 

  

 

 

정면의 함녕전과 좌측의 덕홍전 전경

 

 

함녕전 : 보물 제 820호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며,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한 곳이다.

 

 

함녕전 내부로 천장에는 전등이 설치되었으며,

중앙에 대청을 두고, 이 좌우에 온돌방과 또 그 옆으로 누마루를 두었고, 이들 전면과 후면에는 툇마루와 온돌방을 두었다.

이러한 평면의 모양은 궁궐의 정침(正寢)이 가지는 공통된 것이다.

 

 

덕홍전

 고위 관료나 외교사절을 맞이하던 접견실

 

 

대한제국 황실 문양인 오얏꽃{이화문(李花文)}이 문 위에 새겨져 있고,

이곳에는 서양 가구가 장식하였고, 천장에는 서양식 색전등이 장식하여 방문객을 맞이했을 것이다.

 

 

함영전과 덕홍전 후원의 굴뚝과 모란

학창시절 이곳 모란꽃이 좋아 봄이면 친구들과 덕수궁 모란꽃 보러 가자며 자주 찾았던 추억어린 곳이다.

 

2011년 5월에 담았던 덕수궁 모란꽃

 

 

 

 

 

 

정관헌

고종이 외교사절들과 커피를 마시며 연회를 즐겼던 곳으로, 비가 내리니 사람들이 우산을 받고 다닌다.

 

 

6. 석조전은 인터넷 예약자에 한해 개방되어 다음 기회에 올리기로 한다.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   흥천사의 동종(보물 제1460호)   물시계 자격루(국보 제229호)

 

광명문

원래 광명문은 침전인 함녕전의 남쪽 대문이었다. 1938년에 석조전 서관을 증축하여 이왕가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자동 시보 장치가 있는 물시계 자격루(국보 제229호)와 1462년에 제작된 정릉동 흥천사의 동종(보물 제1460호)

그리고 화약을 이용해 100발의 화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인 신기전기화차(神機箭機火車)를 전시하고 있다.

 

 

물시계 자격루(국보 제229호)

 

 

 

 

 

덕수궁에서 본 시청앞 광장을 지나 조선호텔 방향의 환구단 입구

환구단도 따로 올리기로 한다.

 

 

 

 

지금은 숲이 된 선원전 터

 

 

 

16:00

비가 내린다.

 

 

16:30

비가 제법 내려 덕홍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중화전을 담았다.

 

 

덕홍전 처마 밑에서 비가 내리니 하늘을 바라보는 함녕전을 담았다.

 

 

 

중화전

 

 

비 내려도 많은 사람이 덕수궁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