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24호
을사늑약의 현장 덕수궁 중명전(重明殿)
언제 : 2015년 7월 27일 월요일
젊었을 적엔 유일하게 주어지는 하기휴가를 기다리며 바닷가 혹은 지리산이나 설악산행을 했었는데,
이젠
그렇게 달콤하고 마음 설렌 휴가보다는 쉬엄쉬엄 우리 역사의 현장을 다니다가 그늘에 쉬는 나만의 여행이 좋아
을사늑약의 현장인 덕수궁 중명전을 찾았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중명전은 덕수궁 밖에 있어 덕수궁 돌담길을 걸을 수 있는 여유도 좋다.
정동교회와 정동극장 지나 우측에 중명전 입구를 알 수 있게 설명판이 서 있다.
측면에서 본 중명전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중명전은
1915년에 외국인에게 임대되어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사용되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으나,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 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고,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중명전은 2층 구조이나, 1층만 공개한다.
중명전은
중명전 탄생 - 을사늑약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
4개의 전시관이 있다.
1. 중명전의 탄생
중명전은 1897년경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했다.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 있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명전은 덕수궁에서 홀로 떨어져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 궐역에 속한 전각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제국 당시 전각들이 대부분 훼손되어 현재 덕수궁은 3분의 1정도로 축소되었다.
고종의 일가 - 덕수궁 석조전 중앙홀에서 촬영한 사진
우측에서 영친왕 - 순종 - 고종 - 순정효황후 윤씨(순종의 비) - 덕혜옹주
순정효황후는 영친왕 어머니로,
1910년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 병풍 뒤에서 어전 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 성향의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의 날인을 강요하자, 국새(國璽)를 자신의 치마 속에 감추고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백부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겼고, 이후 대한제국의 국권은 일제에 의해 피탈되어 멸망을 맞게 되었다.
순종의 지위가 이왕(李王)으로 격하됐으므로 그녀도 이왕비(李王妃)가 되어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에 머물렀으며
1926년 4월, 순종이 붕어하자 대비(大妃)로 불리며 창덕궁(昌德宮)의 낙선재(樂善齋) 석복헌으로 거처를 옮겨
1966년 2월 3일, 석복헌(錫福軒)에서 심장마비로 73살의 나이에 불우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
중명전에서 영친왕
노년기의 영친왕
▽
2. 을사늑약을 증언하는 중명전
△
을사늑약의 장소
1905년 11월 18일 00시 20분 왜놈들에게 포위 돼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1층
1905년 11월 초, 총칼을 든 일본 군인들이 훈련을 한다며 서울 거리를 누비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 시각 중명전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조약을 맺자며 고종황제를 위협
고종황제는 강요에 의한 서명을 거부할 목적으로 모든 결정권을 대신들에게 위임한다고 함
며칠 사이 일본은 조선 대신들을 회유함
1905년 11월 17일 오후
어느정도 지지를 얻게 된 이토 히로부미는 대신들을 궁궐(중명전)로 불러 조약체결은 대신들의 의견으로 결정한다며 윽박질
여덟 명의 대신 중
참정대신 한규설과 탁지부대신 민영기가 반대,
법부대신 이하영과 외부대신 박제순은 이도저도 아니어서 이토 히로부미의 핀잔을 들었고,
학부대신 이완용, 내무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외부대신 박제순 찬성
법무대신 이하영도 곧 자신의 의사를 뒤집어 찬성함
1905년 11월 18일 00시 20분
이토 히로부미는 8명 중 5명이 찬성했으니 가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외무대신 박제순과 하야시 곤스케간의 협약서명
을사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은 이미 날짜까지 적어 놓았기에 체결 날짜는 11월 18일 이지만 체결문에는 11월 17일로 명기됨
3.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대한제국 고종 「황제어새」보물 제1618호
복제품으로
1897년 이후 고종이 사용했던 거북이 모양 어새이다. 이 어새는 고종이 비밀리에 보내는 편지나 문서에 사용했다.
4.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
1907. 4. 헤이그 특사 위임장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비극의 장소이다.
이 협약서명이 끝나자마자 일본은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부임하게 된다.
이 중 이완용은 총리대신역으로써 기유각서(사법부, 교도행정권 전권 이양)을 체결하고
한 발 더 나아가 이완용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을 일제에 완전히 편입시켜 버린다.
'경술국치'라고 칭하는 것이 바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말하며,
일제 36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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