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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서울) 사적 제117호 을미사변의 현장 건청궁(乾淸宮) 여름

 

사적 제117호

을미사변의 현장 건청궁(乾淸宮) 여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경복궁(景福宮)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민씨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으로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른다.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은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鹿山)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케 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하였다.

건청궁이 건립된 지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불이 나자 고종은 창덕궁으로 생활공간을 옮겼으며, 1885년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 때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할 때까지 10여 년간 이곳에서 지냈다.

한편 건청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발전기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이며,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곤녕합에서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철거되었으나, 복원하여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고종의 사랑채 장안당

 

 

 

 

 

곤녕합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장

 

 

곤녕합 옥호루

 

 

 

곤녕합 전경

 

 

 

곤녕합 후원

 

 

 

 

 

곤녕합의 굴뚝

 

 

건청궁 전경

 

 

 

 

 

열상진원 샘

이 샘은 경복궁 창건(1395년) 당시부터 있던 왕궁의 샘으로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경복궁 중건(1868) 때 만든 것이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향원지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물결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꺾어지는 수로는 둥근 돌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한다.

 

 

 

향원정 : 보물 제1761호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자립의 일환으로 건청궁을 지었는데

그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서 그 가운데 섬을 만들고 세운 2층 정자로,

고종 4년(1867)부터 고종 10년(1873) 지어진 것으로 추정

 

 

건청궁에서 향원정에 들어가는 나무다리 길이가 32미터, 폭 1.65미터를 설치하고 취향교라 하였다.

 취향교는 원래 북쪽에 있었는데 1953년 남쪽으로 옮겼다.

 

 

 

 

 

 

 

 

고종의 서재와 외국사신 접견하는 장소

 

 

 

 

 

 

 

 

자경전 담벽의 화려함

매, 난, 국, 죽이 배치되고 사이사이에 수복강령(壽福康寧) 네글자가 전서체로 새겨져있다.

 

 

자경전: 보물 제809호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자경전 청연루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 제 809호

 

 

 

 

민속박물관

내가 고등학생 때 민속박물관을 지어 더욱 인상깊다.

 

 

경회루(慶會樓) 국보 제224호

조선 1412년 (태종 12년)창건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 타, 고종 4년(1867) 4월 20일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 을미사변

 

사건의 실행자가 일본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목격자인 궁녀, 환관, 태자 이척 등이 증언한다.

또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아파나시 세레딘 사바틴(Sabatin)과 시위대 교관인 미국인 다이(W. M. Dye) 대령이 현장을 목격하였고,

범인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서양 각국에 알려졌다.

 

일본은 명치유신이래 조선의 지배를 대외침략정책의 제1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목표에 결정적인 걸림돌은 청국과 러시아였다.

청국은 자국의 수도 북경의 안전을 위해 조선이 타국에 지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는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을 통해 동아시아로 진출을 모색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주의 안정과 한반도의 영토보전이 

필요하다는 입장하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청국과는 물론, 러시아와도 일전을 치러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한 재무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조선에서도 반일적인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일본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러시아세력과 손을 잡고 일본세력을 축출(引俄拒日)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배후에서 유도한 것은 주한러시아공사인 베베르(Karl I. W○ber)였지만, 조선측의 핵심 인물은 왕후 민씨였다.

베베르는 일본의 조선지배를 견제하려는 것이었고,

왕후는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압제로부터 탈피하여 고종의 권력을 복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전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러시아를 상대할 준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일본이 당면한 내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조선에서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인 왕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역사적 평가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보며, 또한 대한제국 성립의 한 원인으로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