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윤선도원림 세연정 -2
명승 제34호
겹 입히어 무디어진 일상을 벗어나는 것을 우리는 일탈이라 한다.
그 일탈 중
자기를 돌아보고, 앞날을 바라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여행이며, 특히 걷고 걷다가 잠시 쉬어갈 때 보이는 풍경이
바다이건 산골이건 참으로 새로운 정신을 갖게 한다.
보길도 여행에서
푸른 바다를 무심히 바라보며 걷다가 쒸잉 지나가는 승용차들을 보며 피곤했던 시간이
집에 돌아와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순간순간을 떠올려보니 그 시간이 여행에서 값진 순간이었음을 알게 한다.
특히 보길도 여행에서 단지 보고 지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힘들지라도
나를 버리고 또다른 누군가가 되어 찾아가, 머물며, 만지고, 느껴본 것이 알싸한 여행의 맛이었다.
세연정은 어느것 하나 획일적인 것이 아니며,
어쩌면 거치장스러울 수도 있을 세연지의 칠암 등은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자연을 살리는 풍광이라
더욱 좋았다.
회수담(回水潭)
세연정 동쪽 축단 밑에 계담에서 인공연못으로 흘러드는 터널식 수입구(水入口)가 있다.
계담쪽에서 물이 들어가는 수구는 다섯 구멍이며, 인공 연못쪽으로 나오는 수구는 세 구멍이다.
이를 '五入三出' 이라 하는데 이 구조는 아주 독특한데 물막이 석축에 다섯 곳의 흡수구를 만들어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되,
배출하는 구멍은 세 곳만 만들어 들어오고 나가는 수량을 조절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이다.
△
서대(西臺)
현재는 나선형으로 세단이 남아 있으며, 그 규모는 축단의 한 변이 7.5m 정도의 정방형이며, 높이는 2.2m에 이른다.
춤을 추며 돌면 정상에 오르도록 나선형 계단으로 만들어졌다.
△
동대(東臺)
세연정에서 바라보아 오른쪽 판석보 옆에 위치해 있고, 규모는 가로 6.7m와 세로 7.5m의 장방형으로,
높이는 약 1.5m이다.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 사람이 어울려 군무를 즐겼던 곳으로 평형이다.
측면에서 본 세연정
세연지에 반영된 세연정과 바위들이 인상적이다.
△
판석보(板石洑)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으며,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 하도록 만들었다.
보(洑)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
고산 윤선도(1587~1671)는 해남에 있을 때
병자호란의 소식을 듣고 강화도에 도착하였으나,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에서 적에게 항복한 이후였다.
이에 고산은 세상을 버리고
제주도로 가는 길에 보길도의 경치에 취하여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고산은 보길도내 경관이 수려한 곳곳에 경처를 명명하고 그곳을 오가며 성정함양과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부용동은 그가 13년간 오가며 〈(어부사시사〉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이기도 하다.
고산은 노년을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가 85세(1671)로 낙서재에서 일생을 마쳤다.
오우가(五友歌)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고산의 오우가는 해남 금쇄동에서 지은 글이지만, 세연정을 둘러보며 느낀 것 또한 수석과 송죽 그리고 동산에 달이
함께 있음을 본다.
고산 윤선도는 1587년 음력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삼각산 근처(후일의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서
생부인 예빈시직장 윤유심(尹唯深)과 생모 순흥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 때인 1594년(선조 27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가 되어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잇는다.
큰아버지 윤유기는 어초은 윤효정의 4대 종손이었으나 늦도록 아들이 없었다. 생부 윤유심은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지만,
양아버지 윤유기는 관찰사(觀察使, 종2품)에 이르렀다. 생모 안씨는 좌의정 안현(安玹)의 손녀이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또한 거침없는 발언과 형식,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으로 적을 많이 만들기도 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조는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에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다. 자연을 소재로 지은 시조 짓기가 뛰어나서 정철,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가인(三大詩歌人)으로 불린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이며,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고,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길도 부용동원림(명승 제34호)은
세연정을 비롯하여 최근 복원된 곡수당, 낙서재, 동천석실 등에 고산의 경관의식과 자연에 순응하는
전통적 조경수법이 내재된 조선시대 대표적 원림유적이다.
우리나라 3대 별서정원으로는 1. 윤선도의 보길도 부용동원림 2. 양산보의 담양 소쇄원원림
3. 정영방의 영양 서석지원림을 꼽는다고 한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고산이 부용동에 은거하며 우리말로 지은 40수의 노래로,
그 내용은
어부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바다와 삶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어부(漁父)는 고기를 잡는 어부(漁夫)가 아니라 자연에 묻혀 세상 모든 시름 잊고 한적하고 청일한
어부의 생활을 본 받으며 자연과 함께 살고자 하는 노래이다.
격렬한 어부의 삶 보다는 바다를 즐기며 조금은 관조자적 모습을 볼 수 있고, 노래에 후반구가 있어
뱃전을 두드리며 장단에 맞춰 주고 받으며 부르게 되어있다.
특히 어부사시사 춘사(春詞)에서
우는 것이 뻐꾹샌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배 저어라 배 저어라
어촌의 두어집이 안개속에 들락날락
찌거덩 찌거덩 어야차
맑은 깊은 연못에 온갖 고기 뛰논다.
우는 것이 뻐꾹샌가 - 청각적이며 동적인 것이라면
푸른 것이 버들숲가 - 시각적이며 정적인 표현이 일미이다.
고산이 일생을 마쳤던 낙서재와 곡수당 그리고 동천석실은
다음 기회에 올리기로 한다.
부용동에서 본 바다 풍경
미역 양식장
△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보길대교
▽
노화도 노화읍 전경
해남 땅끝마을에서 노화도를 거쳐 보길도를 둘러보고,
내일은 청산도를 가기 위해 완도 화홍항행 배를 타는 동천항으로 이동했다.
입항하는 배가 완도 화홍항까지 나를 실어다 줄 배다.
뒤로 보이는 섬은 소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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