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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일본 오사카) 오사카 성의 텐슈카쿠(天守閣)

오사카 성의 텐슈카쿠(天守閣)

 

 

오사카 성의 텐슈카쿠는 오사카 성의 핵심부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3년간에 걸쳐 공들여 세웠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으킨 오사카 여름의 진(1615년)

처음 불타 1629년 재건되었으나 1665년 벼락을 맞아 다시 불타버렸다.

오랫동안 방치된 텐슈카쿠는 1931년 철근 콘크리트 공법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단다.

 

텐슈카쿠는 총 8층이며,

성안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오사카 성의 역사를 소개하는 자료가 많이 있으며

8층 전망대에서 오사카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텐슈카쿠로 입장하는 모습

 

오사카 성의 우물

 

 

 

텐슈카쿠 앞에는 아주 큰 대포가 정렬되어있는데, 아마도 2차대전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엘리베이트가 6층까지만 운행되어 8층 전망대까지는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6층에 전시된 오사카 성 여름 전투(1615년 5월)

유키무라 사나다 군대와 타다나오 마츄다이라 군대의 전쟁 그림이며 이 전쟁으로 오사카 성은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함락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들 히데요리와 그의 아내는 자결을 하게 된다.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센히메(千姬)와 결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 사위인 것이다.

나중에 히메지 성에서 센히메(千姬)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겠다.

 

그림을 구분해 담아본다.

 

 

텐슈카구 8층 전망대에서 본 오사카 풍경

 

남쪽

좌 하단 오사카 시립 박물관 - 좌중앙 연록색/KKR Hotel Osaka - 우중앙 멀리 높은 빌딩/텐노지 아베노 하루카스 300

 

 

남서 방향

좌끝 멀리 텐노지 츠텐카쿠(通天門)  - 우측 오사카 역사박물관

 

 

남서쪽

 오사카 역사박물관 - NHK 오사카 방송국- 오사카부 경찰본부 - 맨앞 둥근 흰건축물/니시노마루 정원 -

우측 높은 빌딩 아래 반 잘린 건물/오사카부청사

 

 

서쪽

우상 끝 붉은 원 - 덴포잔 대관람차

 

북서 방향

 

 

북서 방향

좌 검은 빌딩/OAP Towers - 중앙 네모/오사카시립종합병원 - 우 검은빌딩/Crystal Tower

 

북쪽 방향

맨앞 공원 오사카 Bussiness Park

좌 Crystal Bldg.- Twin 21 Bldg.- 앞 빌딩/Matsushita IMP Bldg.-우측 둥근건물/오사카 성 Hall -

 뒤 검정빌딩 OBP Castle Tower Bldg - 옆 흰반쪽건물/Hotel New Otani Osaka

 

 

동쪽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농민 출신임에도 일본을 호령하는 쇼군(將軍)의 자리에 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지지부진으로

1598년 화병에 걸려 초라한 죽음을 맞고, 한동안 그의 죽음을 감춘 채 조선에 머물던 왜군은

  일본으로 철수하면서 노량해전에서 참패를 당한 후 임진왜란은 막을 내린다.

 

권력은 자연히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6세)에게 이양됐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며 히데요리를 잘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욕으로

 1600년 히데요리를 누르고 스스로 쇼군에 오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지지세력을 제압하는 데 실패해 결국 자기 손녀인 센히메(千 姬 당시 7살)를

이종사촌지간인 히데요리(당시 11살)와 정략적 결혼을 시킨다.

 

기회를 엿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1년 도요토미 가문의 재산을 탕진하게 만들려고 교토의 호코지를 재건하게 하여 공사가 끝날 무렵

 종에 새긴 문구를 악용해 히데요리에게 역모죄를 씌우고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1614년 11월 이에야스는 20만 대군으로 오사카성을 진격했으나

겹겹히 설치된 오사카성의 해자(垓字)를 넘지 못하고 쌍방이 소토보리(外堀)을 메우는 조건으로

 상호불가침 조약에 합의에 이르는 그 직후,

 조약의 내용을 무시한 채 해자 전체를 메우고 여름인 1615년 5월에 전쟁을 일으켜 오사카 성을 함락시킨다.

 

결국

히데요리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오사카 성 구석에서 자결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2대로 대가 끊겼고,

 그를 따르던 무리는 이에야스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하는 참혹한 결말이 이어졌다.

 

이후 일본 통일을 이룬 이에야스는

1620년부터 지방 호족들을 끌어들여 오사카 성의 재건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 지방 호족(다이묘)의 세력을 악화시켜

 중앙집권화를 더욱 강화하고

 수도를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옮겼고 도쿠가와 가문은 대대로 쇼균을 배출하여 근대화가 시작된 1867년까지

 유명무실한 일왕을 대신해 250년간 일본 제일의 권력으로 군림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계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여동생인 아사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결혼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千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결혼했다.

 

 일본 맥주 중사히 맥주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제로 이혼시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결혼시킨 여동생 이름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실이다.

 

 

전시물

 

 

 

텐슈카구 모형 전시물

 

 

 

전시물- 갑옷과 조총

 

 

 

토요토미 히데요시像

 

http://www.shouzou.com/mag/p/hideyoshi_itsuou0.jpg

 

도요토미 히데요시 초상화

 

http://i.imgur.com/tHkGOO4.png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이며 현재 일본 정부를 상징하는 인장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고시치키리몬(五七桐紋)이라고 하며, 사실 이 문장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문장이 아니라,

본래는 일본 덴노 가문이 쓰던 문장 중 하나였다.

 

 

전시물

 

 

 

 

 

 

 

거석 운반도

 

 

 

거석 축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