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경복궁의 가을
언제 : 2014년 11월 7일 금요일
지난 9월 22일
외손자가 태어나 낮에 일을 하는 아내 대신 손자도 돌보고 딸 수발도 들다보니 9월과 10월이 훌쩍 지나버렸다.
당연히
창문으로 보이는 먼 산의 단풍만 바라보며
올 가을은 이렇게 지나나 했는데,10월 26일 딸과 손자가 그들 집으로 돌아가고
10월 31일
아내와 모처럼 2박3일 고향에 가서 동생들과 함께 장비와 인부들을 사서 선산 정리를 하고 돌아와
늦은 가을 여행을 떠나렸는데,
11월 8일
딸과 외손자가 다시 우리집에 와 일주일 더 머물겠단다.
이유는 딸이 손자를 안다보니 팔목이 아파 엄마 아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더는 가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배낭에 카메라를 담아 전철로 서울 시청역에 내려 경복궁을 향했다.
경복궁 남문(南門) - 광화문(光化門)
▲
정오의 광화문 수문장 교대식
▼
▲
흥례문(興禮門)
근정문(勤政門)
금천(禁川)을 가로지른 영제교(永齊橋)
▲
근정전(勤政殿) 국보 제 223호
▼
사적 제117호 경복궁(景福宮)
현재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5대 궁궐 중 정궁(正宮)에 해당하는 것으로 북쪽에 자리하고 있어 북궐(北闕)로도 불린다.
조선왕조를 연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경복궁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1394년(태조 3) 12월 4일 시작된 이 공사는 이듬해 9월 중요한 전각이 대부분 완공되었다.
궁의 이름은 〈시경 詩經〉에 나오는 왕조의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군자만년개이경복'(君子萬年介爾景福)에서 따왔다.
5대 궁궐 중 가장 먼저 지어졌으나
이곳에 왕들이 머문 기간은 1405년(태종 5) 지어진 일종의 별궁인 창덕궁(昌德宮)에 비해 훨씬 짧다.
세종·문종·단종이 이곳에 주로 기거했으며, 왕자의 난으로 인한 개성천도 기간 동안 빈 궁궐이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경복궁을 기피해 창덕궁에 기거하면서 임금이 살지 않는 궁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 동궁에서 일어난 화재와
1553년(명종 8)에 일어난 내전일곽의 화재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이듬해 복구되었다. 38년 뒤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건물이 불탄 후 270여 년간 폐허상태로 있다가 1865년(고종 2) 대규모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1868년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나, 1876년에 일어난 대규모 화재로 다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1888년 재차 옮기는 등
여러 차례의 피해와 복구가 거듭되었다. 1904년 이곳에 통감부가 들어섰고
1917년 11월에 일어난 창덕궁의 대규모 화재 뒤 이를 복구하기 위해 1918~20년 원래 있던 건물을 해체했다.
또 이곳에서 나온 건축자재의 방매와 국립중앙박물관이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립 등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1996년 12월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 등으로 일부가 복구되었다.
평일임에도 많은 관광객이 경복궁을 찾는다.
▲
영추문(迎秋門) 경복궁 서문
늦은 가을이라 단풍은 빛을 잃고 떨어져 속절없이 길 위에 뒹구는데,
중년의 마음도 그와 같다.
국보 제 224호 경회루(慶會樓)
경회루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누각으로, 앞면 7칸, 옆면 5칸의 중층(重層) 건물로 익공계(翼工系) 양식이며,
팔작지붕인 이 건물은 장대석으로 축조된 기단 위에 서 있다.
아래층은 외주방형과 내주원형으로 된 48개의 민흘림석주가 상층목조부분을 지탱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방전(方塼)을 깔았고,
우물천장을 아름답게 단청했다. 경회루가 갖는 건축적 특징은 평면구조·칸수·기둥수·부재길이 및 창의 수 등에
〈주역〉의 이론을 적용해 신선의 세계를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경회루는 외국 사신의 접대와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 다시 지은 것이다.
처음에는 경복궁의 서북쪽에 연못을 파고 작은 규모로 지었던 것을 1412년(태종 12) 서쪽으로 옮겨
큰 연못을 파고 4각형의 인공섬 위에 더 크게 세웠다. 이때 경회루로 이름지었고,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을 만들었다.
1429년(세종 11) 중수되었고, 1475년(성종 6) 다시 고칠 때 48개의 석주(石柱)에 구름 속에서 노니는 용을 조각해
조선 3대 장관의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경회루를 지나 향원정으로 가는 길에
경복궁 주산인 백악산
경회루의 뒷 태
▲
풍기대(風旗臺) 보물 제 847호
풍기대는 대 위에 구멍을 뚫어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가늠했던 관측기구이다.
18세기 유물로 추정하며, 탁자 모양의 돌 위에 긴 팔각기둥을 세우고 넝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가을 여심(女心)
▲
경복궁 아미산 굴뚝(보물 제 811호)
교태전 뒤뜰에 경회루 연못을 판 흙으로 만든 아미산(峨嵋山)과 벽돌로 쌓은 굴뚝
경복궁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현재 4개의 굴뚝이 서 있는데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따위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
자경전(慈慶殿) 보물 제809호
1867년 자미당(紫薇堂) 터에 조대비(趙大妃)를 위해 건립되었는데, 불타버려 1888년(고종 25)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앞면 10칸, 옆면 4칸의 장방형 평면의 동쪽 정면에 앞면 1칸, 옆면 2칸의 청연루(淸讌樓)와 앞면 6칸, 옆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
그리고 서쪽 뒤쪽에 앞면 2칸, 옆면 6칸의 방과 대청이 부속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ㄴ'자형이다.
▼
▲
청연루(淸讌樓
▲
자경전 십장생 굴뚝(보물 제 810호)
자경전은 왕실 최고의 여자 어른인 대비의 침전으로 많은 온돌방이 마련되었고, 그 방들에서 나온 여러개의 굴뚝을 모아
하나의 큰 굴뚝을 만들었다. 전벽돌 담장의 일부를 한 단 앞으로 내밀어 생긴 벽 사이의 공간은 연기의 길이 된다.
굴뚝 벽면 중앙에 큰 화면을 만들어 여러모습들을 조형적으로 조각했다. 이 화면에는 장수를 주제로 삼아 솔, 거북, 사슴, 불로초 등
오래 사는 십장생들을 묘사했다.
아래위로 작은 화면들을 만들어 여러 동물들을 배열했는데, 학은 장수를, 박쥐는 부귀를, 나티와 부갓리는 악귀를 막는 의미이다.
이 굴뚝은 나이 많은 여주인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한폭의 정교한 벽화라고 할 수 있다.
▲
국립민속박물관
▼
'牛馬처럼 걷는 서울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 서울 북촌 가을 나들이 (0) | 2014.11.13 |
---|---|
2014 경복궁 향원정의 늦가을 (0) | 2014.11.10 |
(서울) 관악산 연주암과 연주대 (0) | 2014.09.22 |
(서울) 25년만에 관악산에 오르다 -1 (0) | 2014.09.19 |
(서울) 도봉산 오봉과 여성봉 (0) | 2014.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