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495호 낙산사(洛山寺)
명승 제27호
언제 : 2013년 8월 22일 목요일
어디 :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번지
가슴이 답답하거든 길을 나서라,
목적 없이 걷다 보면 마음의 길이 열린다. 그리고 나를 용서하라.
이것이 雨村의 지론입니다.
문득
찾아간 곳이 낙산사였습니다.
그간 속초야 여러 번 갔으면서도 2005년 4월 5일 낙산사가 불타기 전에 방문하고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이른 새벽 아내에게조차 말없이 집을 나서 찾아간 곳이 낙산사였습니다.
야생화의 나비 한 마리가 낙산사로 나를 인도합니다.
낙산사 일주문
부도전
낙산사 들어가는 길
불에 탄 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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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탄 나무와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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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꽃과 나비
낙산사 화재 자료 전시장을 침통한 기분으로 나서는데, 싸리꽃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세심대(洗心垈)
낙산사를 입장하기 위해서 먼저 마음을 씻는 곳
홍예문
낙산사 입구인 홍예문 아래에는 법구경 말씀 두 개가 서 있어 나그네의 발길을 잡습니다.
낙산배 시조목
선열당
취숙헌
해수관음 성지 낙산사(洛山寺)
한국의 해수관음 성지는 예로부터 양양 낙산사,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여수 향일암을 꼽아왔습니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이곳에서 기도합원을 하게 되면 그 어느곳 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낙산사 설명문 참조)
사천왕문
범종루
동종 :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어 고향실 옆 종각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2005년 산불로 소실.용해되어 2006년 10월에 복원하였다.
조선 시대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함으로써 중창이 시작된 것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예종의 명으로 주조되었다.
종명(鐘銘)에 제작 연원과 주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크기는 전체높이 158cm, 입지룸 98cm이다.
빈일루(賓日樓)
빈일루는 동해의 일출을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으로, 2005년 산불로 훼손되어 2009년 10월 12일 낙성하였다.
현판은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스님이 썼다.
빈일루 앞의 두 그루 나무는 지난 2005년 화재 때 불 탄 나무인데 소생하고 있다.
응향각
설법전과 종무원
담장(垣墻)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원통보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으로, 조선 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높이는 약 3.8m, 전체 길이 약 220m로 일부 원형이 남아 있고 대부분 2005년 산불 이후에 연결.보수하였다.
원통보전과 7층석탑
원통보전(圓通寶殿)
관세음보살님을 봉안한 낙산사의 금당으로 671년 의상대사가 홍련암 관음굴에서 21일 기도 끝에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여의주. 수정염주와 함께 사찰의 건립위치를 전해 받은 곳에 원통보전을 세웠다.
원통보전에 봉안된 건칠관음보살좌상은 보물 제1362호로 고려시대 후반의 전통양식이며 강원도에서는 유례가 없는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불상이다. 2005년 산불 때 불상은 무사할 수 있었고, 현 전각은 2007년 11월에 복원하였다.
보물 제1362호 건칠관음보살좌상
우촌은 여기서 부처님께 삼 배를 하며 아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간구했습니다.
칠층 석탑(七層石塔) : 보물 제499호
의상대사가 처음 세울 때 3층이던 것을 1467년 세조 13년에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를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탑의 높이는 6.2m로 부분적으로
손상된 곳이 있으나 상륜까지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조선시대 다층석탑의 전형적인 시대별 특징을 갖고 있어
보물로 지정된 석탑이다.
낙산사(洛山寺)
낙산사는 통일신라 문무왕 11년(671년) 고승 의상대사가 창건한 강원도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절로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항상 머무르며 설법하고 계신다는 보타낙가산의 '낙산'에서 유래되었다.
정확한 창건 시점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기도 하지만,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670년 직후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보기 위해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간 기도를 올리다 절을 짓게 됐다는 창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기도 중 뜻을 이루지 못한 의상이 투신하려 하자 관음보살이 바닷가 굴속에서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건네주며
“내 전신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圓通寶殿·중심법당) 자리이다.
의상은 관음보살이 가르쳐 준 곳에 법당을 지은 뒤 낙산사라 이름 붙였다.
낙산은 관음보살이 항상 머무른다고 알려진 곳이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음상이 보관되어 있다.
이 관음상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하고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 관모봉 영혈사에서 옮겨왔다는 관음보살상이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낙산사는 1300여년간 불과 전쟁 등으로 여러 차례 탔다가 재건되는 수난을 되풀이했다.
통일신라 원성왕 2년(786년)에 화재로 사찰 대부분이 소실됐으나 헌안왕 2년(858년) 범일대사가 중건했다.
그러나 고려 고종 41년(1254년) 몽골 침입으로 사찰의 일부가 훼손됐다.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중건했고 성종 2년(1471년)에 중수했으며 인조 9년(1631년) 등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늘려 지었다. 그러나 정조 원년(1777년) 화재로 소실돼 정조 21년(1797년), 철종 5년(1854년) 등 여러 번 중건을 거듭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소실되고 말았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3년에 다시 창건한 것이다.
낙산사는 1993년에 보타전 신축이 마무리되면서 현재의 가람 구조가 갖춰졌다.
관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과 종각, 해수관음보살입상, 관음전, 공중사리탑, 요사채(고향실, 무설전, 심검당), 종무소(무이당),
보타전, 의상조사비, 조계문, 사천왕문, 홍예문, 일주문, 부부도전, 의상대, 홍련암 등 20여채로 구성됐다.
특히 조선 세조 1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진신사리가 출현한 공중사리탑(보물 제1362호)
예종 원년(1469년)에 주조한 동종(보물 제479호), 조선 초기 작품으로 보이는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등의
보물급 유물이 사찰 내에 있었으나 동종은 지난 화재 때 불에 타 새로 주조한 것으로 보물에서 제외되었다.
의상이 앉아서 참선한 자리에 세운 의상대,
사찰 입구에 있는 홍예문과 원통보전 둘레에 있는 담장 등은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으나
2005년 4월 5일 양양군 일대 대형 산물로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2009년 10월 12일 복원 불사를 회향하였다.
강화 보문사와 남해 보리암과 함께 3대 관음 기도도량으로 꼽히며,
간성 청간정, 강릉 경포대, 고성 삼일포,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통천 총석정, 평해 월송정(또는 흡곡 시중대) 등과 더불어
관동팔경에 속하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강화 보문사 -2013.01.23. 남해 보리암 - 2013.07.04 제 블로그 참조하십시오
(문화재청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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