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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전남 강진) 사적 제107호 천 리 길 물어 찾아간 다산초당(茶山艸堂)

 

천 리 길을 물어 찾아간 다산초당(茶山艸)

(사적 제107호)

 

 

언제 : 2013년 7월 2일 화요일

어디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이다. 그 중 가장 오랜 기간(11년) 머물며

후진 양성과 실학을 집대성한 성지가 바로 이곳 다산초당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에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까지 다산은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글 읽기와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6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다산 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언덕길

 

 

 

 

 

 

 

 

다산초당 오르는 길에 드러난 뿌리의 길

 

 

 

 

 

7월 염천에 산길을 오른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나, 목적이 있기에 땀이 흘러내리는 것은 즐거움이다.

 

 

살다보면

아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듯,

산길도 땀 흘리면 오르다 보면 좋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게 된다.

마치

우리 여정처럼.

 

 

땀 흘리며 오르니 저 앞에 다산초당과 서암이 보인다.

 

 

다산초당은 당연히 초가였다.

그러나

보존이 허술하고 허물어져, 1958년 강진 다산 유적보존회에서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1카의 기와집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서암(西庵)

윤종기 등 18명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으로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현판은 추사체를 모각한 것이다.

 

18명의 제자들

1. 이유회(1784~1830) 2. 이강회(1789생) 3. 정학가(1783~1859) 4. 정학포(1786~1855) 5. 윤종문(1787~1870) 6. 윤종영(1792생)

7. 정수칠(1768생) 8. 이기록(1780~1837) 9. 윤종기(1786~1841) 10. 윤종벽(1788~1817) 11. 윤자동(1791~1852)

12. 윤아동(1796~1898) 13. 윤종심(1793~1853) 14. 윤종두(1798~1852) 15. 이택규(1796년생)

16. 이덕운(1794년생) 17. 윤종삼(1798~1878) 18. 윤종진(1803~1879)

 

 

다산초당 4경

1. 정석 2. 다조 3. 약천 4. 연지석가산으로 아래에 사진과 함께 자세히 기술되었다.

 

 

다산초당 전경

 

 

염천에 천 리 길 다산초당을 찾아온 것은

다산초당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다산 선생의 숨결과 흔적을 보며

젖어 이해하려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다산초당에 유배 중인 다산을 찾아와 머물면서 가르침을 받고 돌아갔다는 인연으로

과천시절에 쓴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다.

 

 

 

 

 

관어제(觀漁齊)

다산초당 오른쪽 연못이 보이는 문 위에 걸려있는 현판으로 다산의 글씨를 모각한 것으로

"다산이  초당 측면에 붙은 문을 열고 연못 속에 노닐던 물고기를 바라보던 곳."

 

 

정석(丁石)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 1 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약천(藥泉)은 다산초당의 제 2 경으로,

1808년 봄 다산께서 직접 파서 만든 샘으로 이 물로 차를 끓여 마셨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으며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 고 기록했다.

 

 

 다조는 다산초당 제 3 경으로,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다산초당 제 4 경으로,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내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내일 장마가 온다하고 월요일이라 이따금 바람 외엔 찾아오는 이 없이 적막한데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조심스레 찾아가 보니 목관을 타고 내리는 비류폭포 물소리와 연못에

큰 개구리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 알겠다.

 

지구는 둥글고 사방의 땅은 평평하다.

그러니

내가 있는 곳 보다 더 높은 곳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곤륜산이나, 형산, 곽산을 오르며 높은곳을 찾아 다니는 사람이 있다.

지나간 과거는 쫓아가 잡을 수 없고, 다가올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지금 이상황보다 더 즐거운 때는 없다.

그런데도 더 좋은 수레를 갈망하고, 논밭에 마음 태우며, 기쁨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

땀을 흘리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평생토록 헤메면서

오로지

'저' 것을 바랄 뿐, '이' 것을 참으로 누려야 하는 줄 모른지가 오래 되었다.

다산의 산문 바로 '이' (斯) 중에서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했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보정산방(寶丁山房)

추사가 유배 중인 다산을 찾아와 머물러 배우면서 다산의 높은 학식과 사상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직접 쓴 친필 글씨로

"정약용 선생을 보배롭게 여긴다." 라는 뜻으로, 전서체이다.

 

 

 

다산동암(茶山東庵)

다산의 친필

 

 

 천일각(天一閣)

천일각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세웠다.

 

 

 

다산초당을 떠나야 할 시간이라 아쉬움이 크나, 방명록에 찾아온 사연과 인적 사항을 적어 놓고,

너무 혼탁한 요즘의 정치, 사회의 현상을 보며

지금

 

우리에게 다산처럼 국민을 사랑하고 자신의 부귀와 영광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위정자들이 많아 올바른 나라를,

그리고 국민은 불의와 타협치 않은 올바른 국민이 되어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