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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전남) 다산(茶山)이 유배지의 시름을 달래며 걸었던 다산길

 

다산(茶山)이 유배지의 시름을 달래면 걸었던 다산길

 

 

어디 : 백련사 ~ 다산초당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삶이라.

 

한때 정조의 신임을 받아 벼슬에서 승승장구하던 다산 정약용이

어느 날

멀고도 먼 남도 강진 만덕산 기슭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삶에 대한 회의, 인간에 대한 배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다산초당에서 약 1km의 산길을 걸어

다산보다 열 살이나 어린 백련사 혜장스님을 만나 차를 마시며

유배지의 시름을 달래었을 길을 걸어본다.

 

 

다산초당~백련사 간 숲길은

다산 선생이 초의선사, 혜장법사 등과 차와 시국담을 나누며 거닐던 숲길로서

남으로는 드넓은 구강포의 해안선이 펼쳐져 있고, 북으로는 만덕산 깃대봉(408m)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주변에는 천년고찰 백련사와 천연기념물 제151호 동백숲이 주변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200년 전 조선의 지식인 다산은 동백숲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7월 뜨거운 햇살 받은 접시꽃 연분홍 빛깔이 다산의 시름을 아는 양 붉어 서럽다.

 

 

정약용 선생의 호는 몇 개가 있으나 그중에서 다산(茶山)을 우리는 많이 봐 왔다.

다산이 호가 된 연유는

예부터 백련사 절 뒤편에는 야생차가 많았다. 그래서 백련사를 품에 안고 있는 만덕산의 옛 지명은

차나무가 많다고 하여 다산이었다.

 

(백련사 차밭)

 

그래서

조선시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호가 바로 이것이다.

다산은 명맥이 거의 끊어졌던 한국 차 문화를 다시 일으킨 주역이기도 한데, 강진 유배 시절 백련사 차를 즐겼다.

차를 보내 달라고 백련사 혜장스님에게 써 보낸 애교 섞인 편지 '걸명소'가 남아 있다.

 

(백련사 차밭)

 

“나그네는 요즘 차를 탐식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중략〉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 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베풀어 주소서.”

 

다산이 유배시절 백련사의 혜장 스님(1772-1811)에게 차(茶)를 보내주길 간절히 부탁하는 내용의 편지다.

 

 

정약용의 호(號)

다산 (茶 山 ): 다산초당의 뒷산인 만덕산의 옛이름.

여유당(與猶堂): 노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세상을 조심스럽게 살아 가자는 것이다. '여'는 겨울 냇물을 건너듯 하고, '유'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다의 뜻이다. 

삼미자 (三眉者 ): 눈썹이 셋이란 뜻으로, 어렸을 적 천연두 흉터로 눈썹이 세개 처럼 보인다

사암(俟菴): 정약용의 삶과 사상에 대하여 후손들의 평가를 기다리겠다는 의미.

열수(洌水): 조선시대 한강을 이르던 말로, 정약용 생가가 한강변에 있음이다.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 등이있다.

 

 

백련사에서 차를 마시고 초당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런 가파른 길을 올랐을 것이다.

 

 

茶山과 초의선사와의 관계

불교에 귀의한 스님이면서도 초의는 당대 유가의 명사, 시인들과 폭넓은 교분을 가졌는데 다산과의 인연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초의는 귀양이 풀려 고향 마재로 돌아간 다산을 보러 천 리가 넘는 먼 길을 마다 않고 갈 정도였다.

 대둔사(해남 대흥사)의 12대강사로 백련사에 있으면서 다산초당에 유배와 있던 다산과 가깝게 지냈던 혜장에 의해 만난

두 사람은 속세의 나이를 뛰어 넘어 깊게 사귀게 된다.

이 때(1809년) 다산은 不惑의 나이를 훨씬 넘어 오십 고개를 향해 오르고 있었으며 초의는 24살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혜장과 사귀면서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하였던 다산은

초의에게서 차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초의는 다산에게서 주역과 시문을 배웠다.

<동다기>와 <다신전>을 지어 후인들에게서 조선 차의 중흥조로 불리는 초의는 유학자인 다산과 속세와 산문의 경계를 뛰어 넘어

교분을 쌓는데 이 인연은 다산의 두 아들인 학연과 학가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은 여름 날 장마 비에 갇혀

초당의 다산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초의의 안타까움이 베어 있는 詩(阻雨未往茶山草堂)의 일부이다.

장마비가 괴롭게 서로를 막으니 채비를 갖추고도 스무날을 보냈다

어른의 분부를 제때 지키지 못하니 어디에도 내 진심 하소연할 곳 없구나

 

해월루(海月樓)

2007년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잇는 다산길 몰랑에 강진군에서 해월루를 세웠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음력 보름날 만월은 강진만을 밝히는 달무리가 곱다.

 

 

해월루에서 바라본 강진만과 멀리 장흥 천관산에 흰 구름이 조망된다.

 

 

 

 

 

 

  당연히 다산 때는 없었을 나무이나

 다산에게

 세상을 거꾸로 보기를 가르쳐 줬던 민초들의 넋이 살아 있는 듯 제멋대로 뒤틀리고 뿌리가 드러나 있다.

 

 

정약용의 詩 소개

 

제비 한 마리 처음 날아와 지지배배 그 소리 그치지 않네.

말하는 뜻 분명히 알 수 없지만 집 없는 서러움을 호소하는 듯

“느릅나무 홰나무 묵어 구멍 많은데 어찌하여 그 곳에 깃들지 않니?”

제비 다시 지저귀며 사람에게 말하는 듯 “느릅나무 구멍은 황새가 쪼고 홰나무 구멍은 뱀이 와서 뒤진다오.”

 

조선 후기의 시대상을 우의적인 수법으로 풍자한 시로 제비의 입을 빌려 약한 백성을 약탈하는 관리들에 대한 비판과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황새와 뱀의 공격 때문에 집을 잃고 떠도는

 제비의 고통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실은 당시 지배층들이 서민들을 착취하는 모습을 우화적인 수법을 동원하여 풍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에 나오는 제비는 지배 세력으로부터 착취당하는 서민층을 의미하며,

황새와 뱀은 서민들을 괴롭히는 지배 세력을 의미한다.

 

 

 

 

 

다산이 귀양살이한 지 10년째 되던 해,

부인 홍씨가 그리운 정을 표시하기 위해 시집올 때 입고 왔던 다홍치마 다섯 폭을 다산에게 보냈다.

아마도

'당신도 내가 그리울 것이요, 나도 당신이 그립지만 달리 정을 표하고 달랠 길 없으니,

신혼처럼 즐겁던 때를 회상하면서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빛바랜 다홍치마를 사랑의 정표로 보낸다.'는 뜻이었으리라.

얼마나 은근하고 그윽한 사랑의 표시인가!

다산은 그 치마를 재단하여 두 아들에게는 교훈의 글을 써주고,

외동딸에게는 화조(花鳥)를 그리고 화제(畵題)를 적어 주면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살라고 했다.

 

다산 유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

 

 매조도(梅鳥圖 1813년 정약용-영인본-고려대박물관 소장)

 

월훨 새 한 마리 날아와 우리 뜰 매와나무에서 쉬네.

진한 그 매화향기에 끌려 반갑게 찾아왔네.

이곳에 머물과 둥지 틀어 네 잡안을 즐겁게 해주어라.

꽃은 이미 활짝 피였으니 토실한 열매가 맺겠네.

 

1813년 7월 14일에 열수옹(洌水翁)이 다산 동암(東菴)에서 썼다.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붉은 빛이 바랬다. 잘라서 첩(帖) 네 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다산이 강진에서 귀양살이 할 때 딸에게 시집 식구들에게 잘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으로 그려준 작품이다.

 

 

 

 

 

적막(寂寞).

바람마저 나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지 숨죽이고 있다.

 

 

쭉 뻗어 하늘 향한 사철 푸른 대나무가 외로움을 못 이기고 군집해 서로의 채취를 맡고 있다.

 

 

 

 

 

 

 

 

 

 

 

대나무 울타리가 호젓한 다산길 끝에 다산초당과 산길을 경계하고 있음은

다산초당에 다 왔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 실학의 정점이던 茶山,

그의 위대함은 18년간 유배길에서 만들어지는데, 

다산초당에서 꽃피우며, 고독한 유배의 시간을 함께 해준 이가 있었으니 혜장 스님이다.

적적한 시간이 오면 다산은 혜장 스님을 만나기 위해 오솔길을 걸었다.

다산과 혜장 스님은 이 길을 통해 백련사와 초당을 오가며 교류했을 것이며, 이때 다산은 차와 선(禪)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강진 만덕산 기슭엔

천 년 동백숲과 다산이 걸었던 오솔길, 풍광 좋은 강진만, 달라고 떼쓰던 찻잎이 있고 그리고 역사 깊은 백련사가 있다.

오솔길을 걷고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만덕산 물로 차를 마시던 다산과 혜장스님을 그려보며

염천에 땀 흘려가며 다산길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