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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전남 여행

(전남 강진) 다산이 유배되어 처음 4년간 머물렀던 주막, 사의재(四宜齋)

 

다산이 유배되어 처음 4년 머물렀던 주막, 사의재(四宜齋)

 

 

언제 : 2013년 7월 1일 월요일

어디 :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동성리 495-1

 

사의재(四宜齋)

다산 정약용이 1801년 11월23일 추운 겨울 낯선 땅 강진에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東門賣飯家)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드잡아

교육과 학문 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용모언어행동, 이 네 가지 바로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기르셔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얘기에 자신을 새로 추스른 다산이 1802년 10월경부터 최초 제자 황상을

시작으로 강진읍 6제자에게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교재로 교육을 베풀었으니

당대 최고 권위의 학당이 강진에 창설된 셈이다.

 

 

 한양 조정 권신사회의 잔혹함과 견딜 수 없는 기구함과 절망감으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던 다산이 마침내 "내가 강진에 귀양오기를 참 잘 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토로할 만큼 따뜻했던 강진지역의 인심에 마음과 몸을 열어 지역 현실에

참여하면서 조선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병리를 보다 생생히 목격하고 체험해가던 시기였다.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은 비좁은 이곳 사의재에서 광활한 희망의 세계를 꿈꾸며

집필되었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 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다산은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강진읍 보은산 고성사(고성암)내 보은산방(寶恩山房)에 머문다.

이곳에서의 다산은 강진읍 6제자를 교육하는 한편, 총 52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으며, '주역사전' 과 '상례사전'

등의 저작에 몰두하였다. 강진 차(茶)에 대한 관심이 깊어는 무렵이었다.

큰아들 학연이 강진에 내려와 때로는 스님들과 더불어, 때로는 6제자들과 함께 주역과 애기를 논하면서 밤이 새는 줄 몰랐던

시기이기도 하다. 보은산방은 선생이 정상에 올라 멀리 흑산도에 유배 중인 약전 형을 그리워하며

눈물짓던 그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다산이 다산초당에 입주하기까지 7년간 주막과 암자 등을 전전하였는데

사의재에서 4년, 보은산방과 다른 곳에서 3년간이다.

 

 

동문터

 

 

 

 

 

다산이 추운 겨울 낯선 강진 땅에 유배와 처음 들렀던 동문주막으로 그때 그의 행색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

 

 

 

 

 

신유사옥(辛酉邪獄)과 황사영 백서사건

 

천주교에 관대한 정조가 죽자,

 조선 순조 때 노론 벽파가 득세하게 되어 천주교도에게 박해를 가하게 된 사건으로,

기해사옥, 병인사옥과 더불어 천주교 박해 3대 사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때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 남인 학자와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사형을 당하자

이에 신자인 황사영은 베이징의 서양인 주교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는 서한을 비단에 써 보내려다가

발각이 되어 처형 되고 말았다.

이를 신유사옥과 황사영 백서사건이라고 하며,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 사위이다.

 

 

다산의 6제자

1. 손병조(생년미상) 2. 황상(1788~1870) 3. 황취(1792~1867) 4. 황지초(1793~1903)

5. 이청(1792년생) 6. 김재정(생년미상)

기타 여러 제자들이 있었음.

 

 

 

 

 

 

 

 

 

 

 

 

 

 

 

 

 

 

 

 

 

 

 

사의재 옆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연꽃 몇 송이 머금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주모상(酒母像)

사의재 뒤 조그만 녹지가 조성되어 그곳에 주모상이 있는데, 아직도 쟁쟁한 주모의 한 말이 들리는 듯하다.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는가?"

사람을 볼 줄 알았고 비록 주모이나, 말의 옳음을 받아드리는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이 없었다면......

 

 

어젯밤

그렇게 퍼마셨지만, 다산 선생이 머물렀던 사의재의 동문주막에서

막걸리 한 사발 마시는 것도 의미가 있어

주모에게 추어탕과 막걸리를 주문하니 미안하지만, 낮에 장사거리가 다 떨어져

저녁에나 준비된다니 이게 무슨 일이람!

 

강진에서 제법 이름난 주막이라며, 나 외에 세 사람도 식사도 못 하고

나처럼

발길을 돌려야 했다.

 

순천에서 너무 늦게 이동하여 18:00 문을 닫는 다산 기념관과 다산 초당 그리고 백련사는 늦어

내일 일찍 방문키로 했다.

 

동문주막과 사의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