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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馬처럼 걷는 인천 여행

(강화) 삼별초 항쟁비가 있는 외포리 풍경

 

삼별초 항쟁비가 있는 외포리 풍경

 

 

강화도 여행을 하면서

몽고의 침략으로 1232년(고종 19년) 최우에 의해 고려왕조가 강화도로 천도하여 1270년까지

39년간 수도였던 강화에 고려 역사를 보여주는

 고려 궁지· 강화 산성· 4곳의 고려 왕능· 삼별초 항쟁비· 선원사지· 이규보묘 등이 있어 탐방 하였는데

 삼별초 항쟁비를 보지 못하다가

삼별초 항쟁비가 있는 강화 외포리에 다녀왔습니다.

 

 

강화 외포리 풍경으로 배 뒤에 낮으막한 동산 아래에 삼별초 항쟁비가 서 있습니다.

 

 

외포리는 강화군 석모도와 불음도 등을 오가는 포구라서 갈매기가 눈에 띕니다.

 

 

고즈넉한 포구 풍경

 

 

귀가를 서두르는 여행객을 모시고 석모도를 오가는 배가 외포리에 닿았습니다.

 

 

외포리 젓갈시장 뒷편 삼별초항쟁비와 망양돈대 이정표가 길을 안내합니다.

 

 

삼별초 

고려 고종 때 최우(崔瑀)가 도적을 잡기 위해 용맹한 자를 뽑아 야별초(夜別抄)를 설치했는데 뒤에

그 군사가 많아지자 좌·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의 고려 침입 때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을 모아 부대를 창설하여 신의군이라 불렀는데,

좌별초·우별초·신의군(神義軍)의 3개 별초군(別抄軍)의 총칭입니다.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사병(私兵)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공병(公兵)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병으로 보는 견해는, 그것을 설치한 사람이 최우였다는 것과 〈고려사〉 병지(兵志)에 나오는 "권신이 집권하자 이들(삼별초)을

조아(爪牙)로 삼고 녹봉을 후하게 주며, 혹 사사로이 은혜를 베풀기도 하고……

권신은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고 이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했다"라는 기사에 크게 의거합니다.

 

이에 반해 삼별초는 국가 재정으로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지출했다는 사실과,

삼별초는 당시 무인집권자의 사병이었던 도방(都房)이나 마별초(馬別抄) 등과 엄격히 구분되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삼별초를 공병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삼별초가 정부군으로서 독립하지 못하고 권신의 수족이 되어 그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병을 사병처럼 이용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며,

원종이 몽고의 후원을 받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삼별초가 이에 반발하여 1270년(원종 11)에 봉기한 것이 삼별초의 난입니다.

 

 

삼별초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최우가 설치했다는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한 것은 1231년(고종 18)이고,

1232년 기록에 야별초의 기사가 나오므로 최우가 집권한 1219년 이후부터 1231~32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이와 달리 신의군에 관한 기사가 1257년에 처음 나오고

좌·우별초에 관한 기록은 그 다음해 기사에 처음 나오므로 그 전후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며

 별초라는 임시군대의 편성은 이미 1174년 조위총의 반란 때 나타난 기록이 있습니다.

 

 

삼별초 항쟁비 뒤로 낮으막한 동산에 망양돈대가 있어 둘러 봅니다.

 

 

 

 

 

 

 

 

 

 

 

돈대 입구

 

 

돈대 내부

 

 

돈대를 쌓은 돌이 새것과 옛것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해 질 녘 강화 외포리 풍경

 

 

여행을 다니면서 해 질 녘이면, 

하루 머물면서 둘러보지 못한 곳도 보고 갈 것인지 아니면 돌아가고 다음에 또 올 것인지

항상 심한 갈등을 합니다.

 

 

젓갈시장에 들러 마른 서대와 대구 그리고 창란젓을 사 귀가하여 맛나게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