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읍성(樂安邑城)
사적 제302호
어디: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읍성
언제: 2012년 9월 29일 월요일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에 가서 객지에서 온 조카들과 낙안읍성을 둘러보았다.
어렸을 적엔
옛 국민학교 건물이 지금은 옛 객사로 재현 되었고 초가집에 돌담길 그리고 성벽과 문루도 잘 정리되었고
판소리에 어울려 노래와 춤도 추고 여자 조카들의 한판 씨름은 가관이었다.
아쉽게도
지난 3차례 태풍으로 초가지붕이 날려 비닐로 군데군데 둘러씌워 조금은 아쉬웠다.
동문(樂豊樓)와 석구
낙안읍성은
평야지에 있는 읍성으로서 연대를 보면 조선조 태조 6년(1397) 낙안 출신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의병들과 함께 쌓은 토성(土城)으로 그 후 1626(인조4년 5월 ∼ 1628년 3월) 낙안 군수로 부임한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에 의하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 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그리하라 하였으며,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성곽의 길이는 1,410m, 높이 4∼5m, 넓이 2∼3m로서 면적 41,018평으로 성곽을 따라 동서남북 4개의 성문이 있었으나
북문은 호환(虎患)이 잦아 폐쇄하였다고 전하여 오고있다.
동문은 낙풍루(樂豊樓) 남문은 쌍청루(雙淸樓) 또는 진남루(鎭南樓)라고 하고 서문은 낙추문(樂秋門)으로서
성문 정면으로 ㄷ자형 옹성(瓮城)이 성문을 외워 감싸고 있다. 여장엔 활을 쏠 수 있도록
사방 1尺정도의 총안(銃眼)=사구(射口)가 있고 이 총안 역시 근총(近銃)과 원총(遠銃)으로 나누어 있다.
또 여장이 타구(朶口)로 나뉘어 있고 성곽을 따라가면凸 형의 성곽이 있는데 이는 치성(雉城)이라고 한다.
당초 6곳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4곳만 남아 있다.
이 치성은
초소(망루) 역할을 했던 곳으로 좌우로 침입하는 적의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성벽을 타고 오르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축조되었다.
낙안읍성의 특징은
대개의 성곽이 산이나 해안에 축조되었는데 반해, 들 가운데 축조된 야성(野城)으로 외탁(外托)과 내탁(內托)의 양면이
석축으로 쌓여 있는 협축(夾築)으로 되어 있다.
백이산(584m)을 배경으로 본 낙안읍성
모과나무와 돌담길
물레방아
남문(雙淸樓)
동문에서 남문까지의 해자
해자는 성곽 주변에 땅을 파거나 자연적인 지형 지물을 이용하여 성의 방어력을 높이는 기능을 가진 성곽 시설물의 하나로
적의 침입에 장애가 되는 하천이나 바다 등을 이용한 자연적인 해자와 인공적으로 호를 파거나 고랑을 낸 인공 해자로 나눈다.
낙안벌
(멀리 벌교 부용산과 뾰쭉한 고흥 첨산)
오봉산(592m)을 배경으로 본 낙안읍성
서문은 누각이 없다.
낙안읍성의 주산 금전산(670m)
대장금 촬영장
우물(큰샘)
이 우물은 옛날 군수가 드셨다하여 큰샘이라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낙안읍성이 행주형(行舟形)으로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는 것을 금하였으며, 낮은 곳에서 나오는 우물을 사용토록 하였는데 이는 성내에 깊은 우물을 파면
배밑이 뚫리어 배가 가라앉는다는 하여 배 안의 물을 퍼 낸다는 의미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물을 마시면 착한 마음과 미인이 된다는 설이 있다.
하늘을 나는 참새떼와 콩꽃이 핀 돌담길
임경업 군수의 비각
낙민루
조선 헌종때 군수 민중헌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며 1924년 일부분 수리하였다고 한다.
남원 광한루, 순천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써
오랜 세월 희노애락을 나눈 누각이었으나 6.25때 불에 타 소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하였다.
동헌(東軒) = 사무당(使無堂)
이 건물은 조선왕조때 지방관청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
동쪽방은 수령이 서쪽방은 관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동헌
안채
노거수
객사(客舍) = 낙안지관(樂安之館)
지방 유형문화재 제170호로 지정된 객사는 최초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450년 조선 세종 32년 낙안군수로
재임한 이인(李茵)이 중건하였다. 그 후 1857년(철종8년) 군수 이명칠이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객사는 왕명으로 고을에 내려오는 사신이나 귀빈을 영접하고 머물게 하는 곳으로
중앙 마루는 정당이라고 하며, 마루 안쪽에 전패를 안치하여 매월 삭망(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일에는
군수 이하 관속들이 나와 향궐망배(向闕望拜)하였으며 좌우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의 숙소이며 동쪽방은 문인
서쪽방은 무인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객사 뒤의 노거수
낙안읍성 내에 동편제 판소리 공연장이 있어 어울려 놀고 소리도 할 수 있다.
고목에 붙은 ? (뭔가 닮았는데 알 수 없네!)
부산 조카들과 그네도 타고
씨름 하는 용감한 女조카
(막내 남동생 딸과 막내 여동생 딸이 씨름을 하여 막내 남동생 딸이 이겼다.)
막내 남동생 딸과 둘째 남동생 딸의 씨름에서도 막내 남동생 딸이 이겨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1872 지방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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