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상원사와 적멸보궁
1989년 초여름
월정사를 둘러보고 소금강을 볼 욕심으로 상원사를 보지 못하고 월정사부터 걸어서 진고개를 넘어
소금강을 구경했는데
물론
그 시절엔 비포장도로였고 도중에 쉽지 않은 Hitch-hike 해 진고개에서 소금강 입구까지 인심 좋은
분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 후
상원사와 오대산 비로봉을 오르지 못함을 늘 아쉬워했는데
(1989년 초여름 소금강 입구에서)
2009.7.22. 수요일
마침 시간을 내어 다시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오대산 비로봉 산행을 하기로 했다.
07:15 동서울 터미널에서 진부행 직행버스
09:00 진부터미널 도착
09:40 상원사행 시내버스
10:30 상원사 입구에 도착했다.
오늘 계획은 버스로 상원사와 적멸보궁을 보고 비로봉과 상왕봉 산행 후
상원사에서 월정사까지 도보로 이동하며
늦으면
월정사와 상원사 중간 오대산장에서 1박 하고 다음날 월정사를 볼 예정이다.
오대산 상원사는
월정사의 말사인데, 중대 적멸보궁 가까이에 세워진 절이다.
상원사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이처럼 큰 바윗덩어리에 '오대산 상원사'라는 글씨와 '적멸보궁, 문수성지'라는 직인형태의 황금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재밌는 사실은 이 표지석에 얽힌 이야기다. 이 바위는 절근처의 하천정비 공사중에 발견된 자연석으로 절입구에 두었다가 한차례 도난을 당한 적이 있으며, 되찾은 후에 이렇게 표지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표지석 글씨의 주인공은 노무현 대통령 비석 글자를 새긴, 성공회대학 석좌교수인 신영복 교수다. 그는 소주 상표 '처음처럼'의 글자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오대산 상원사라는 글자만을 새겨넣기엔 너무나 큰 표지석이어서 적멸보궁이 있는 상원사이며, 문수도량이라는 표시의 문수성지를 넣어 달라는 스님들의 요청에 글자색이 검은색과 황금색으로 구분했으며, 모든 글자를 넣기 위해 인장형태의 글씨가 들어갔다는 사연이다.
문수전
문수전의 예불(좌측- 문수동자상)
목조문수동자좌상 - 국보 221호
문수동자상은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며,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양볼을 도톰하게 하여 천진해 보인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가슴에는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편 가슴 쪽으로 치우쳐 드러난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매었는데 옷주름이 명확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한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
이 불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 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조선 세조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크기는 98센티미터이며, 국보 221호.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하고 있었다. 그 때 지나가던 한 동승(童僧)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등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렸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했다.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자 노스님은 "나는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23점의 복장유물은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는 매우 드문 예를 보여주고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등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白紙墨書眞言集)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御衣를 싼 노랑색 명주 보자기 등이 있으며 전시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하고 있다. | |
고양이 석상(문수전 앞)
상원사 문수전 앞에 있는 고양이 석상도 조선 세조 임금과 관련 있다.
하루는 세조가 기도하러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하자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소매를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괴이하게 여긴 세조는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을 모신 탁자밑에서 세조를 죽이려는
자객을 찾아냈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 고양이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묘전(猫田)을 하사했다. 그래서 예부터 상원사를 중심으로 사방 팔십 리 땅이 모두 상원사 땅이었다.
좌/ 영산전. 우/ 청량선원
청량선원(淸凉禪院)은 오대산을 다른 이름으로 청량산이라고도 하는 데서 유래되었는데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이다.
이 선원은 1947년 월정사 주지 이종욱 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의 건물을 본떠 지었다.
동북 45도 방향의 이 선원은 정면 8칸, 측면 4칸의 ㄱ자형 건물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신미대사의 발원에 따라 세조가 상원사를 왕실의 원당(願堂)으로 삼으려고 학열스님에게 친히 불사를
주관하게 했다,
학열스님은 세조 11년(1465)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동서불전(東西佛殿)을 비롯하여 누각, 나한전,
청령당, 승당, 선원 등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법당은 1946년 선원 뒤에 있던 조실(祖室)에서 실화로 전소되자,
1947년 새로 지은 것이다. 육이오 전쟁 때 군인들이 법당을 불 태우려 하자 방한암 스님이 목숨을 내걸어 지킨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선원 안에는 목조 문수동자상(국보 221호), 문수보살, 서대에서 옮겨온 대세지보살상, 그리고 문수동자좌상의
복장에서 나온 유물(보물 793호)들이 전시되어 있다. | |
중앙 건물이 동종을 보관하고 있다.
동종 좌상단부 9개 꼭지 중 처음 한 개가 없는 이유.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현존하는 한국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데 없는 이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다가 조선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다시 옮겨진 것으로,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이다.
음통(音筒)이 있는 용뉴(龍뉴) 아래 종신은 약간 길쭉하게 배를 불리다 끝에서 안으로 살짝 오므라든 형태가 이상적인 비례감과 안정감 있는 조형미를 이루었고, 풍부한 양감과 함께 세부적인 묘사 수법이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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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鐘身)에 있는 상대, 하대, 4유곽(乳廓)의 문양은 당초문을 바탕으로 2 ~ 4인의 작은 주악비천상(奏樂飛天像)이 있는 반원권문(半圓卷紋)이 새겨졌고, 종복(鐘復)에 비천상과 교대로 있는 당좌(撞座)는 8판연화문(八瓣蓮花紋)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비천상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구름 위에서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나 또 공후(공후)와 생(笙)을 연주하는 손의 표현이 매우 섬세하여 생동감이 넘친다. 볼록한 두 뺨, 유연한 신체에 걸친 천의 등은 8세기 전반의 이상적인 사실풍의 불교 조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정상에는 약동하는 용이 있고 그옆에는 연꽃이 조각된 음통이 붙어 있다. 용뉴 좌우에는 70자에 달하는 명문이 해서채로 음각되었는데 첫머리에 '개원 십삼년 을축 3월 8일 종성기지(開元 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鍾成記之)'라고 되어 있어,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원사 종에 보이는 음통, 종 끝부분이 안으로 오므라든 종신형(鐘身形), 상대와 하대 및 4유곽 등의 주조적인 특징은 한국 종의 대표적인 유형이 되어 이후의 모든 종이 계승되었다. 국보 제36호. 이 종의 소재 사명(寺名)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는 경북 안동 본부(本府) 문류(門樓)에 걸려 있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종은 안동 근처의 어느 사찰에 봉안되어 있다가 태종이 불교를 박해할 때 안동 문루로 옮겨졌다고 한다. 세조 때 상원사에 봉안할 종을 팔도에서 찾고 있던 중 안동에 있던 이 종이 선정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세조가 승하한 직후인 예종 원년(1469)에 상원사에 도달했다고 한다. 종을 안동에서부터 상원사로 옮겨오던 중에 3,379근(斤)이나 되는 큰 종이 장차 죽령(竹嶺)을 넘으려 하는데 노상에서 움직이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종꼭지를 하나 떼어서 안동으로 보내니 비로소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설을 입증하듯 네 곳의 유곽 안에 1곽(廓)의 종유가 하나 없다. 이러한 고사는 대종 운반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속신앙의 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 |
중대사자암
중대 사자암의 비로전
오대산(五臺山)의 '오'라는 숫자는 석가모니, 관음보살,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보살 등 이른바
오류성중을 뜻하고, '오대'란 이들이 상주하고 있는 다섯암자 즉,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 그리고 중대 사자암을 뜻한다.
오대산 비로봉을 오르려면 중대 사자암에서 물을 채워 가면 좋을 듯
무엇이 높은 오대산 정상 턱밑까지 할머니들을 오시게 한 것일까?
적멸보궁 오르는 계단
적멸보궁
상원사에서 중대사자암을 거쳐 적멸보궁까지는 약 40분 정도 걸린다.
좀 가파르긴 해도 길이 잘 정비돼 있어 오르기 어렵진 않다. 불공을 드리러 쉬엄쉬엄 오르는 할머니들이 많이 있다.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봉안한 오대산 적멸보궁은 5대 적멸보궁(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중 하나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얻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불교 성지다. 다른 적멸보궁은 불사리가 어디에 안치됐는지 분명한데 오대산 적멸보궁은 알 수가 없어 더 신비감을 준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음택(陰宅·묏자리)중 최고의 자리로 꼽혔으니 여기에 진신사리를 모셨을 것이다. 비로봉이 흘러내린 가파른 능선 위에, 어떻게 이런 자리가 있을까 싶은 좁지도 넓지도 않은 곳에 편안히 위치한 적멸보궁은 그 앞에 서기만 해도 뭔가 성성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 일대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으로 적멸보궁은 용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위치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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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안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선원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일찍부터
월정사 산내 암자에 그치지 않는 명성을 누려 오고 있다. 특히 사람이 자주 다니는 도로에서 멀지 않은데도 깊은 산사의 숙연한
분위기가 매우 뛰어나, 참선수행으로써 본래의 참면목을 깨우치려는
눈 푸른 수행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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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 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 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좇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 곳이 지금의 상원사이다.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이색(李穡)의 ' 오대 상원사 승당기(五臺上院寺僧堂記) ' 에는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英露庵) 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 고 적혀있다.
고려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 들어 더욱 거세어져 불교는 극박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고 11종(宗)이던 불교 종파를 7종으로 통합하는 등 척불에 앞장섰으나 만년에는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 또 나아가서는 권근(權近) 에게 명하여 '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까지 그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불은(佛恩) 에 젖게 하라 ' 고 하였다.
이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나라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불서의 간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중에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일화가 그것이다. 이렇듯 세조와 상원사는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1984년에 발견된 문수동자 복장에서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문수동자상을 봉안한다는 발원문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근세에는 방한암 스님이 오대산으로 들어온 뒤로 상원사에서 이십칠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수도 정진하였으며 수련소를 개설하여 후학 양성에 진력하였다. 오늘날에도 전국에서 선남선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불교 성지로서 명성을 얻고 있다. | |